늦고 빠름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만은, 친구들 중에서는 첫 연애가 꽤 늦은 편이었다.
그리고 대학생활을 하면서 연애가 늦다는 건 좀 불편했다.
참견 좋아하는 사람들의 “넌 왜 남자 친구가 안 생기냐?”는 질문도 곤란했지만, 친구들이 유행처럼 커플링이라도 맞추고 오는 날은 대화에 끼일 수가 없어 머쓱했다.
커플링뿐만 아니라 기념일, 데이트 코스, 근사한 레스토랑.
그런 류의 주제는 셀 수도 없이 많았기에, 점점 뒤에서 쭈뼛거리는 날들이 늘어갔었다.
그러던 와중에 시작된 B와의 연애는 화려하고 대단할 것도 없었지만 소소하고 행복했다.
내 취향이 아니었던 또 B의 취향이 아니었던 영화들도 보러 다니고, 크리스마스트리가 빼곡한 명동, 종로, 강남 시내 곳곳을 구경가기도 했다.
노래방에서 ‘여자 친구 생기면 불려주려고 아껴뒀다’ 던 노래를 나에게 불러주었고, 서로 평생 읽지 않았을 것 같은 책도 추천해줬다.
B는 내게 <남자의 향기>라는 책을 추천해줬었는데, 당시에 읽던 겉멋 가득한 건조한 문체의 책들과 너무나도 다른 느낌이라 흠칫했던 기억이 난다.
평화롭다고 생각했다.
그 평화로운 행복감에 젖어 조금씩 내가 우울감에 잠기고 있다는 사실 조차 한 달이나 지나서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너무나 좋았는데, 이상하게 우울했다.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았고 쉴 새 없이 서로 웃는 게 좋았다.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습관들과 반응들을 관찰했다가 조곤조곤 이야기해주는 것도 좋았고, 전혀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과 교류한다는 것도 참 좋았다.
연애가 아니라면 그만큼 상대방의 영화 취향과 식성과 기분, 말투, 걸음걸이를 자세히 볼 일이 없다는 걸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리 만큼,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번번이 우울했다.
처음에는 그저 매달 찾아오는 호르몬의 영향이겠거니, 날이 추워서 그렇겠거니 넘겼는데 아니었다.
분명 데이트를 끝내고 돌아온 밤이면 어김없이 마음이 무거웠고, 이내 우울감에 무너질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 오래 가진 않았고 이내 평온을 찾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우울한 기분은 연애 초반 나를 내내 잠식했었다.
B와는 2-3년쯤 더 연애하고 헤어졌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보통의 연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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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이십 대 내내 튼튼한 느낌이 묻어나는 연애를 해보지 못했다.
사람마다 안전하고 튼튼한 관계의 정의가 다르겠지만 내게 있어 튼튼한 연애란,
- 안심하고 서로에게 첫 번째 연인임을 확신하고
- 꾸미거나 숨기지 않고 나를 들어낼 수 있으며
- 문제가 생기면 대화로 조율해 나갈 수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이십 대 내내 회사를 다니며 만났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를 테면, 내가 만남을 시작하는 그 설레는 시기에 극도로 우울해져 시작도 해보기 전에 이별을 고하거나, 우울이 극에 달하는 일정 시기를 넘기고 보면 상대방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던가, 결혼 상대로는 날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게 느껴졌다거나, 둘 사이에 발생한 문제를 해소할 만큼 안정적으로 대화하고 있지 않았다.
당황스러울 만큼 연애가 잘 되지 않았다.
물론 다시 그런 튼튼한 연애를 하기 위해 노력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또다시 누군가와 강의 시간표 전체가 똑같아 자연스럽게 만나지는 우연을 기대하기는 힘들었기에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그 노력들을 비유하자면, 마치 화학반응을 위한 요소들 같았다.
화학반응에서 유효한 반응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1. 너무 높지 않은 활성화 에너지를 가져야 하고, 2. 충분한 유효 충돌을 일으킬만한 빈도가 있어야 하며, 3. 필요하다면 촉매를 사용해서라도 유효 충돌을 일으켜야 했다.
1. 너무 높지 않은 활성화 에너지(Ea)
연애 공백이 길어지면 가장 많이 듣는 잔소리는 단연 '눈 좀 낮추라'는 소리일 것이다.
나 역시 참 많이도 들었던 이야기이지만, 취향이라는 건 객관적일 수 없기 때문에 '눈 좀 낮추라'는 틀에 박힌 조언은 따분하기 짝이 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해 누군가는 조인성도 못생기게 느껴질 수 있고, 또 누군가는 강동원에게 이성적 매력을 못 느낄 수도 있는 일이다.
참 성의 없는 잔소리가 아닌가 싶다.
다만, 들었던 중에 가장 현실적인 조언은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 가지를 고르고 그중에서 하나를 완전히 포기하라는 이야기였다.
이건 꽤나 실용적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너의 이런 점은 턱없이 부족하지만, 내가 참고 만난다' 하는 느낌이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의 어떤 점 하나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만약 여전히 문자 길이가 짧은 누군가가 있다면, 문자 하는 대신 전화하는 방법을 택하는 식이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분명 어느 정도의 효과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2. 충분한 유효 충돌을 일으킬만한 빈도(q)
사람을 만날 일 자체를 자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스터디나 동호회 모임 같은 건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했기에, 배드민턴도 쳐보고, 스쿠버 다이빙도 했고, 유행하던 DSLR도 구비해 모임에 참여했다.
같은 취미를 가진다는 건, 남녀 관계를 떠나 누군가와의 관계를 튼튼하게 만들기에 유리한 장점임에 분명하다.
3. 적절한 촉매(catalyst)
결혼정보 회사라는 시스템을 이십 대 중반부터 이용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노력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데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인연을 만나는 일에 우연이나 기다리고 있는 게 이상하다’는 동기의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입사하자마자 가장 유명한 세 개의 결혼 정보회사를 모두 이용했고, 지금의 배우자를 만났다는 동기의 추천에 따라 업체에 가입했다.
다행히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비교적 어린 나이에 등록했기에 결혼 정보 회사 매니저님들은 언제나 날 환영해줬다.
그리고 그들의 필터링 시스템은 우수했다.
기본적으로 내가 호감을 가질만한 상대들을 현실성 없을 만큼 자주 내 삶에 등장시켰다.
그럼에도 번번이 만남이나 관계는 연약했고, 그 끝은 지지부진했다.
매번 틀어진 만남을 정리하고 돌아오는 길은 외로웠고 막막했다.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니 당장 팔리지 않으면 떨이가 된다느니', '주말 내내 소개팅을 해야 할 정도로 서둘러야 하니', 하는 사람들의 먼지 같은 조언들도 물론 나를 불편하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그런 것보다는 막연히 차오르는 불안감이 나를 무겁게 했다.
'난 어딘가 잘못된 거 아닐까?'
인정하기 싫어 내내 외면했지만, 문제는 내게 있음을 조금씩 눈치채고 있었고
내일이 조금도 기대되지 않는 하루의 끝은 언제나 지루하게 길고 멈춘 듯 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