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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Oct 07. 2020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몽글몽글 하지.

첫사랑은 짝사랑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도 나는 텔레비전에 나오던 화려한 아이돌 대신, 대학이라는 새 무대에서 새롭게 덕질할 상대가 필요했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새내기 초여름 나는 여섯 살 위의 기계과 오빠에게 사랑에 빠졌다.

첫사랑, 처음은 특별하므로 알파벳 첫 글자인 A로 그를 부르기로 하자.

내 첫사랑이었던 A는 학교에서 꽤나 인기 있던 “만인의 연인”이었고, 기억 속에서 그는 점점 더 미화되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가볍게 회상하듯 털어놓을 수 있지만, 스무 살 당시의 내 짝사랑은 꽤나 절절하고 깜찍했다.

 

A는 공대 학생회의 일원이었기에 강의 시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학생회실에 있었다.

덕분에 나는 A를 한 번이라도 더 만나기 위해 출력을 핑계로, 과제를 핑계로, 심심하다고 투덜거리며 부지런히 학생회실을 드나들었다.

그때 난 20세기 초 유행하던 첫사랑 영화의 감성 그대로였다.

A가 책을 보면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기 바빴고,

A가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면 후다닥 아무렇게나 펴놓은 전공 책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나름대로는 내 짝사랑을 티 내지 않겠다고, 한 개면 충분했을 음료수를 한 봉지 가득 자판기에서 뽑아 옮겼고,

기꺼이 공대 행사에 가장 활발히 참여하는 학우가 되었다.

농활, MT, 뒤풀이, 체육대회.

A와 마주칠 수 있는 곳곳에 그저 학교 행사가 재밌다는 허울 좋은 핑계로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다행히 ‘만인의 연인’이었던 A의 열성팬들이 함께 해 주었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게 녹아들 수 있었다.


덕분에 유치하지만 두근거리는 추억들도 많이 쌓아두었다.

농활에서 A가 이불 없이 잠든 모습을 보면 한참 자지 않고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몰래 가서 이불을 덮어주었다. 

언젠가 좋아한다는 유기농 아이스크림을 사기 위해 서울 반대편으로 빙 둘러 등교하기도 했다.

한 번은 진탕 술을 먹고, 친구와 서로 부둥켜안고 “내가 그 오빠를 좋아해서 미안하다. 너도 좋아하는 걸 안다”며 서럽게 운 적도 있었다.


그렇게 나한테만 비밀이고 공공연 했던 첫사랑은 풋풋한 풀내음처럼 설레었다.


#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여중, 여고를 졸업하고 바로 남자의 비중이 압도적인 공대에 가는 것이 사실 내겐 조금 버거운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남자’라는 존재 자체가 나의 어느 부분에 흉터로 남아 불편하게 굴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 같다.

특별히 공학에 큰 뜻이 있었다거나,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더 했다.

그저 남들처럼 수능 점수에 맞춰 ‘가, 나, 다군’의 대학 지원에 신중을 기했고, 그중 가장 입학 점수가 좋은 과를 가는 게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기에 입학을 위해 학교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조차, ‘과연 이게 잘한 선택인지’ 낯설고 겁나 마음 전체가 굳어버렸고 그 한 구석으로 덜컹덜컹 돌조각 같은 걱정들이 요란히 굴러다녔다.


그리고 3월, 4월.

아직 추위가 채 녹지 않은 학기 초까지만 해도, 역시 학교에 적응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학년 초였기에 거의 매일 있다시피 한 과모임은 번번이 ‘술을 못 마신다’는 핑계로 빠져나오기 바빴다. 매번 그런 다음날이면 싸이월드에 나만 빼고 찍힌 친구들 사진이 업로드되거나, 강의실에서는 나만 모르는 새로운 에피소드로 떠들썩 해 번번이 나를 조바심 내게 했다.


그즈음 먼저 대학생활을 한 언니의 조언대로 ‘학생회’에 들어갔고, 뭐 하는 곳인지도 잘 몰랐던 그곳에서 우연히 A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내 마음속에 A라는 우상이 생긴 뒤로는, 학교 생활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남자’라고 부르기에 새내기였던 동기들은 어리고 귀여운, 그저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쉽게 적응했고, 또 허물없이 어울렸다.

과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버티며 마시지 않던 (사실은 잘 마셨던) 술도 조금씩 마시기 시작했고,

아무래도 공대이다 보니, 이따금씩 고백을 받기도 했고 썸이라 불릴 만한 해프닝들이 생기기도 했었다.

자연스레 학교 생활은 점점 풍성해졌다. 

학생회 생활 덕분에 과 안팎으로 얇고 넓은 인맥과 좁고 깊은 친구들을 두루 사귈 수 있었다.


그래서 A는 단순히 첫사랑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지도 모른다.


게다가 ‘정신적 지주’를 자처한 그에게 난 정말 많은 조언을 구했고, 상황 설명도 없이 툭툭 던지는 푸념 같은 고민상담에도 A는 언제나 어른스럽게 대답해 주었다.

'지난 2년을 헛산거 같다'라고 말하면, 이유나 상황을 묻는 대신 '인생 80년이나 산다는데 2년쯤 헛살면 뭐 어때?' 하고 말해주었다. '지금 엄청 우울한데, 오빠 어학연수 가서 술 먹자고 말할 수도 없다'라고 투덜거리며 문자를 보내면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줬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라고 답장이 왔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게 앓으며 설레며 2년쯤 간직했던 짝사랑은 당시 유행했던 소설책에 <좋아해요>가 아닌 <좋아했다>는 손 편지를 꽂아 전하는 것으로 그 끝을 맺었다.  

어느새 대학교 3학년, 학교에서 목에 힘 좀 줄 수 있는 큰언니가 되어 있었고, 내 시간을 함께 채워주던 동기 놈들은 빠짐없이 군인이 된 후였다.

역시나 A는 <어색해지기 싫다>는 요지의 장문의 메시지로 투박하지만 정성스럽게 내 과거형 고백을 거절했다.

알고 있었지만 참 마음이 아렸다.


#

시간이 이렇게 한참이나 지나고서 돌이켜보면 그게 내 뒤늦은 사춘기가 아니었나 싶다.

학교 선생님을 짝사랑하듯이 ‘연애하고 싶다’는 감정보다는 ‘그냥 저 사람이 좋다’는 마음이 간절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역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문득 생각해 냈던 건, 내가 6월의 우울증을 잊고 지냈다는 사실이었다.

중고등 학교 시절 내내 성폭행 사건이 있었던 6월, 그 뜨겁게 찐득한 공기가 깔리면 나도 모르게 울적해 조금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었다.

가끔은 너무 우울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스로 여름잠이라고 부르던 긴긴 잠을 청하기도 했고, 멍하게 창밖을 보는 일이 잦았었다.

그 정도가 심각한 건 아니었기에 ‘난 여름만 되면 이상하게 졸리다’며 가족들에게 너스레를 떨고 넘길 수 있었지만, 내내 의식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열정적으로 짝사랑했던 그 스무 살의 6월 이후로는 난 그 사건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공대 체육대회를 끝내고 운동장을 폴랑거리며 뛰어다니던 내게 ‘고생했다’고 입모양으로 말하며 웃던 A의 모습을 떠올렸고, 빙그레 웃음이 났다.

그날도 운동장이 타들어 갈듯 뜨거운 6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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