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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Oct 05. 2020

스무 살의 이상형은 휘파람을 잘 부는 사람이었다

지금 젊은 친구들에게는 낯설겠지만, 2000년대 유행하던 인터넷 감성으로는 100문 100답 같은 걸 할 일이 더러 있었다.

동호회에 가입하거나, 자기소개를 할 일이 있으면 그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는 번거로운 일을 꼭 포함시켜두곤 했었다.

그리고 곧잘 나오는 질문 중 하나가 ‘이성을 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 혹은 ‘이상형’에 대한 것이었다. 난 매번 휘파람을 잘 부는 남자가 좋다고 대답했었다.


목 넘김으로 밥 먹는 남자, 문자 길이가 긴 남자, 그리고 휘파람 잘 부는 남자.

내가 꼽았던 세 가지 이상형의 조건이었다.


일단, 입맛이 까다로운 아빠를 보고 자란 탓에, 반찬 투정이 없는 사람이었으면 싶었다.

그래서 꿀떡꿀떡 목구멍으로 밥을 넘기는 식감만 있으면 그 맛이 짜든 싱겁든, 메뉴 어울림이 좋든 간에 투정하지 않고 잘 먹는 둥글둥글한 게 좋았다.


이제 막 이동통신사들이 앞다투어 “문자 무제한 요금제”를 발표하던 즈음, 사람들은 문자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아끼고 아껴 바이트 수 안에 담을 수 있는 내용을 정성스레 채워 담던 시절이 끝나고, 하나 둘 문자 무제한 요금제가 보편적이 됐다. 자연스레 친구들의 문자가 퍽 성의 없어졌다.

<이따 마치고 도서관 갈 거야? ^-^; 우리 마치고 같이 갈까?> 하고 보내면,

<ㅇㅇ>

하는 녀석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그런 문자가 꽤나 괘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최소한 문자 미리 보기를 통해서 모든 내용을 볼 수 있는 단문의 문자는 받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렇게 추가된 두 번째 조건이 바로 문자 길이가 긴 남자였다.


마지막 세 번째는 우습게도 휘파람을 잘 부는 사람이었다.

당시 떠돌아다니는 먼지 같은 속설에 휘파람 잘 부는 사람은 바람둥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가마가 두 개면 장가를 두 번 간다는 둥, 쌍꺼풀이 한쪽만 있으면 바람둥이라는 둥, 그 근본을 알 수 없는 풍문들.

내게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위험한 생각이지만, 내심 속으로는 바람둥이면 좀 어떤가 했었다.

나만 좋으면 됐지!

그런 속설보다는 난 언제나 흥얼흥얼 조금씩 신나 있는 사람들이 좋았다.

휘파람도 그냥 불어대는 게 아니라, 가끔 노래라도 부르듯이 훌륭한 소리를 내면 난 지나치다가도 뒤를 돌아 다시 꼼꼼히 볼 만큼 그 경쾌한 소리가 좋았을 뿐이었다.


이게 스무 살 즈음, 내가 이성을 판단하는 전부였다.

그땐 그냥 친구들이 내 100문 100답을 보고 ‘야! 이상형이 저게 뭐냐!’ 하면 ‘내 맘이지’ 하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이성에는 늦게 눈을 뜬 게 분명하다.

같이 떡볶이 사 먹고, 문자나 주고받는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그런 종류의 정신적 공감에 더해 육체적인 교류까지 나눈다는 생각조차도 못하고 있었지 않나 싶다.


물론 영향이 크겠지만 굳이 초등학교 때의 비극적인 사건으로 되돌아가지 않더라도 답은 뻔하다. 

여중, 여고를 졸업하며 평범했던 나는 의지를 가지고 건수를 만들지 않은 다음에야 이성을 만날 일이 없었던 탓이 가장 클 것이다.

그럼에도 끊이지 않고 남자들과의 해프닝이 생기는 예쁘고 잘 꾸미는 친구들과 인연이 없었던 것도 이유일 테고.


자연히 관심사는 TV에 나오는 화려한 연예인들뿐이었다.

물론 콘셉트가 신비주의였던 우리 “오빠들”은 꿈에서 조차 섹슈얼 한 느낌은 풍기지 않았었다.


#

언젠가 회사의 남자 동기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로 운을 뗐다.

“대체 여자들은 왜 그렇게 이성이나 성적인 거에 느린 거야?

미성년자나 청소년은 그렇다 쳐. 보통 스무 살이 넘어서는 당연히 다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합의 하에 만나는 법적으로 성인인 남자 친구를 나쁜 놈 만드는 건데?”

아마도 이십 대 초반, ‘연애’라는 단어 아래 허락된 범위가 여자 친구와 달라 꽤나 마음고생을 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10년도 더 지난 일에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술자리의 안주로 꺼내는 걸 보니.


이십 대 초반-

그때 당시에는 이런 고민들을 화두로 올리는 친구들이 드물었던 것 같은데, 지나고 털어놓는 이야기들을 보면 꽤나 마음고생들을 했던 모양이다.

속도가 빨라서 당황스러운 쪽도,

합의되었다고 생각하고 직진했다가 털털거리며 후진을 해야 했던 쪽도.

그냥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단지 모두의 속도가 다른 것임에도

다르기에 삐걱대며, 마음의 줄다리기를 해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시기일 뿐이다.


그저 속도가 다르다는 말이 진부하게 들리고, 그럼에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아마도 그때 내가 했던 답변이 이랬던 것 같다.

“봐봐, 친구야. 난 스물여덟 넌 서른하나. 우리 엄마 아빠가 우리 나이였다면 우린 이미 부모였을 테고, 빠른 사람은 이미 학부모이었을걸?

그런데 우린 부모가 된다는 무게는커녕 결혼조차도 아직 먼~ 먼~ 미래의 일인걸.

그냥 그런 거야. 귀엽게 생긴 어리바리한 내 남자 친구랑은 손잡고 도시락 싸서 소풍 가는 꿈을 꿨는데, 상대는 아마도 다른 꿈을 꾼 거지.

그 시간의 네 여자 친구에게는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을걸?”


정말이지, 지금도 난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사랑도, 나이를 먹으며 세상이 기대하는 어떤 역할들까지도.

제발 경솔했다던가, 이해가 부족했다는 사과 대신 ‘당연하다’는 핑계를 대지 말자.


당연히 기대되는 것 말고, 각자가 쌓아온 시간들을 그대로 인정해 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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