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이 있다.
언젠가 꼭 해야 하는 이야기들을 마음속에 꾹꾹 담아두고 살아가는데, 나는 도무지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양한 이유들이 있었지만 내 이야기란 게 언제나 나 혼자만의 이야기들은 아니었기에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익명의 힘에 숨어 눈치채기 어려운 아주 작은 조각들에 대한 자서전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서전이란 게 무언가 이뤄놓은 게 엄청 많은 사람들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라면, 내 이야기는 조금도 잘나지 않은 자서전이 되겠지만.
그래. 나는 비록 잘나지 않았음에도 할 말이 있고,
더 이상은 미루지 말고 그 이야기들을 시작해야겠다.
하지만 여기까지 결정했음에도, 오랜 시간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다.
언제부턴가 말하고 싶은 것들은 목구멍 언저리까지 가득 차인 기분인데, ‘그래서 끝끝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가 잘 정리되지 않았다.
꼼꼼하게 이야기를 갈무리하고 곱씹고 곱씹어,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사랑과 사람에 관한 것들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내가 경험한 사람과 사랑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담아봐야지.
나는 초등학교 때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는데, 그래서 20대 때 겪었던 사랑들이 모두 조금씩 뒤틀렸고 내내 얼룩져 있었다.
그 얼룩들은 모두 결이 다르지만, 대체로 너무나 견디기 힘든 것들이어서 매번 데인 손을 냄비에서 떼어내듯이 서둘러 찬물을 끼얹어 씻어내기 바빴고, 채 고름이 빠지기도 전에 다시 덮어두곤 했다. 상처 난 피부 위로 스치는 인연마다 따갑기 일쑤였다.
그렇게 이십 대를 지나 보냈다.
지금, 운이 좋은 나는 참 다양한 방법으로 위로받고 치유받을 기회가 있었다.
물론 그래서 모두 극복한 거냐고 묻는다면, 말도 안 된다며 피식하겠지만.
최소한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몇 걸음 떨어져 다시 그 얼룩들을 문질러보고, 들춰도 보고, 물에 헹궈내 볼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볕에 말리려 내놓은 그 얼룩들은 뜻밖에 제법 조화로운 색을 내었다.
결코 우울하거나 침울한 느낌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추억이 그러하듯, 돌아가고 싶은 아득한 느낌이었고 가끔은 키득거릴만한 재밌는 부분도 더러 눈에 띄었다.
그래서 조금 이야기를 시작할 용기가 생겼다.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생각을 정리하며,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까?’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른 장면이 하나가 있었다.
이제는 꽤 시간이 흐른 오래된 일이었다.
#
몇 년을 만났던 그 남자 친구에게 난 참 겁도 없이 내 투정과 불만들을 쏟아냈었다.
그날도 한 소설 작가에 대해서 불만을 쏟아내던 중이었다.
“이 유명하신 작가님의 소설을 두세 개쯤 읽어봤는데, 이 작가 분명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아. 여주인공은 언제나 교회 가서 염불을 욀 정도로 반항심 가득한, 그래서 이해하기 힘든 문제아로 설정을 해. 근데 시종일관 감춰둔 반항심의 이유가 결국은 ‘어린 시절 성폭행의 상처.’ 한 줄로 결론이나. 다른 부연 설명 같은 것도 귀찮은 느낌이야. 그냥 어린 시절 성폭행. 땡. 그거 하나로 다 끝나는 느낌이야”
“응. 그래?”
건조한 대답 위로 난 부지런히 덧붙였다.
“진짜 정말 싫어진 건 뭔지 알아? 그 작가 인터뷰를 봤을 때야. 여주인공에 대해 묻는 질문이었던 것 같은데 그 작가, <여자는 돈 좀 잃은 걸로는 상처받지 않아요>하고 답하더라. 그게 그 인터뷰 기사 제목이었어. 진짜 웃기지? 그럼 뭐 상처받을 일은 성폭행뿐이야?”
뭐 그런 대화를 나눴던 것 같다. 난 그 작가에게 꽤나 화가 나 있었다.
기사가 자극적으로 써진 건지, 정말 작가가 그런 이야기를 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작가의 이야기들에 동조하는 순간, 나까지 성폭행당해 삐뚤어져 사회에 돌을 던지며 “다 망해버려라” 하고 싶은 우울한 여주인공 프레임에 갇히는 기분이었다.
어쩌다 그 이야기가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난 꽤나 씩씩거리며 이야기에 열을 올렸고,
그때 그 남자 친구는 어느 정도 동조하면서도 큰 반응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거기서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 그랬다면 이렇게 기억에 남지는 않았겠지.
얼마 뒤, 남자 친구는 취직 후 첫 출장에 들떴다. 배려심 많은 그는 자기가 없는 공백이 걱정된다며 내게 줄 책을 몇 권 사들고 데이트 장소로 나타났었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책 선물이라니! 잔뜩 고무되어, 바스락 거리는 기분 좋은 서점 종이봉투에서 녀석이 들고 온 책더미를 꺼내 들었다.
순간 나는 손끝이 창백해졌다.
종이봉투에는 며칠 전, 열변을 토하며 악담을 쏟아냈던 그 정신 나간 작가의 책들만 서너 권 담겨있었다.
“너... 이거 지금... 나한테 일부러 그러는 거야?”
화가 났다.
물론 그 친구는 잘해보려고 애쓴 거란 걸 알았지만, 텁텁한 공기가 가슴팍에 차이는 걸 피할 순 없었다.
그 불편한 공기는 이내 목구멍까지 뻑뻑하게 차올랐다.
‘대체 얼마나 내 이야기들을 허투루 들었으면. 세상에! 내 약점들도 다 알고 있으면서’
악이 오를 때로 오른 나는 꽤나 불같이 화를 냈고,
출장 동안 심심해질 나를 미리 달랠 요량으로 사 온 선물 때문에 오히려 화가 난 여자 친구 기분까지 풀어주느라 바빴다. 그 녀석의 첫 출장은 꽤나 바빴으리라.
나중에 화가 좀 풀린 내게 그는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는데, 너를 떠올렸더니 그 작가밖에 안 떠올랐다”라고 말했다. 벼락같이 화를 냈던 게 좀 무안해졌다.
시간이 좀 흘러, 그가 사 온 그 작가의 유명하지 않은 책들까지 의도치 않게 모조리 읽게 된 나는 ‘아, 이 여자가 성폭행당해 삐뚤어진 여주인공이 남자 주인공과 사랑에 빠져 참회하는 얘기 말고도 다른 이야기도 꽤 썼구나’ 하고 혼자 덤덤히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 미워하는 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는데, 덕분에 난 그 작가를 ‘싫어해 성가신’에서 ‘관심 없음’으로 마음속 등급을 변경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난 그 작가의 책도, 인터뷰 기사도 더 이상 관심 있게 보지 않게 되었다.
남자 친구와도 결국 마음만 앞서 서툴렀던 그 친구와 스스로 파놓은 덫에 걸려 아픈 곳을 푹 찔린 덕에 수선을 떨었던 내가 서로 쑥스럽게 화해했던 사소한 일화였다.
#
그런 이야기들이 좀 하고 싶다.
곪은 내 상처는 사람 사이에서 덧나기 일쑤였지만, 그 대부분의 날들에 악의나 악역은 없었다.
단지, 사소한 오해나 배려하지 못하는 서툴음 들을 조정하는 과정들만 있을 뿐이었다.
(물론 가끔 내 시점에서의 악당이 등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이나 매체 속 이야기들은 그렇지 않다.
미투, 페미니스트, 성범죄 그 자극적인 소재들과 날 선 비난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논쟁과 물어뜯어 상처 내기 쉬운 예민한 주제들.
그 어느 행간에도 감히 피해자라고 불릴 수 있는 내가 위로받는 구석은 없었다.
나는 도무지 마주하고 싶지 않았었다.
겁이 났었다.
그래서 나라도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다.
지금 그 무겁고 살벌한 것들 사이에서 간과되기 쉬운, 사람과 사랑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털어놓으며
“그게 다가 아니라고. 누군가는 그저 조금 곪은 부분을 쓸어내며 담담하게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