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shore, 해변의 기쁨

첫 판화의 기억

by 하루

어디까지 늘어선 주차 대기줄을 보고 차를 돌렸다. 행사장과 조금 벗어난 곳의 외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화랑제가 열리는 곳까지 조금 걸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벌써 사람들로 가득하다.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많아져 흥미로웠다. 작가들이 젊어진 만큼 관람객들도 젊어졌다.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미술제와 화랑제를 봐 왔지만 요즘만큼 많은 사람들로 , 젊은이 들로 붐비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남편이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자기 일을 하겠노라 작은 사무실을 얻었을 때 우리는 이제 막 서른을 두세 해 넘기고 있었다. 어쩌면 물정을 몰라 시계나 쓰레기통 같은 실용적인 물건을 다 놔두고 그림을 한 점 선물하고 싶었다. 마침 삼청동에 작은 갤러리를 오픈했다는 대학 선배(갤러리 대표는 그의 아내였다.)의 소식을 듣고 혼자 난생처음 작. 품. 을 사러 갔다.


삼청동 한적한 골목에 있는 작은 이제 막 시작하는 갤러리에선 주로 판화 작품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정면 벽에 나란히 걸려 있던 판화 2점에 마음이 꽂혔는데 가격을 물어보니 예산의 4배.(예산이 워낙 적었다.) 안 되겠다. 예산을 얘기하고 작품을 추천해 달라 부탁했다. 대여섯 점의 판화 작품과 그 작가들을 하나하나 친절히 설명해 주는 선배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계속 처음 눈에 든 그 작품이 놓아지지 않았다. "그냥 저 작품을 살게요." 두 점 다는 못 사고 한 점만! 그렇게 그때 내겐 이름도 생소했던 이우환의 판화 한 점이 왔다.


남편에게 작품을 보여 주니 조금 황당한 표정으로 "이 건 무슨 그림... 이 그림이 왜 좋아?" 한다. "그냥 보고 있으면 마음이 조용해져." "그래.. 음.... 사무실에 걸기엔 좀.... 아까우니까 자기 좋으면 그냥 집에 걸어 놓고 보자." "그럴까~~^^" 매달 통장 잔고가 마른 우물 같던 시절이었다. 우리 잔고 사정엔 좀 과한(판화라 그리 비싸지 않았음에도), 사무실에 걸기엔 어쩐지 너무 조용한 작품을 남편 핑계로 내 맘대로 사놓고 결국은 작은 집 거실 벽에 걸어 두게 되었다. 아무래도 그리 될 줄 알았을 것이다.


작품을 사는 건 처음엔 어렵지만 그다음은 처음만큼 어렵지 않다. 시간이 지나 조금 여유가 생길 때면 하나 둘 작은 소품들을 사곤 했다. 작품을 구매하는 건 내게 작가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리거나 만들 수 있는지 감탄하는 순전한 기쁨을 연장해 곁으로 가지고 오는 일이었다. 직관에 따라 내 맘에 들어오는 그림들을 감탄하며 보는 일은 가장 즐겁고 신나는 일 가운데 하나였다. 또 사무실에서 집에서 그런 그림들을 마주하는 시간은 무슨 일을 하지 않아도 그대로 풍성해지는 순간들이었다. 그러다 요즘 들어 뭔가 이상해졌다.


어느 날 미팅을 하러 간 사무실에서 그림 두 점을 본 후 마음이 묘하게 상했다. 며칠 전 그 작가 전시회를 다녀온 후였는데 이미 다 팔리고 남은 그림이 한 점도 없다던 그 작가. 그림이 참 좋았다. 가격도 가격이려니와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 앞으로 구매하기가 더 어려워질 거라던 그 작가의 작지 않은 그림을 두 점이나 살 수 있는 사람이라니. 그림이 왜 내 마음을 움직였는지 하는 감탄은 날아가고 집으로 돌아온 저녁 내내 그 걸 살 수 있는 사람과 그 걸 살 수 없는 나에 대한 생각만 남았다. 질투다.


"...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시인의 말처럼 질투로 이루어진 희망은 슬프다. 그림을 보는 순전한 기쁨이 어느 순간부터 불안한 질투로 바뀌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작품 가격을 머릿속에 계산해 넣으며 내 취향과 직관에 대한 믿음은 뒷 전에 두고 타인의 취향에 예민하게 구는 나를 보는 건 서글프다. 그림보다 돈이 먼저 보이는 시장에서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겠지만, 요즘 난 종종 울고 싶어 진다. 높은 파고를 잘 타고 넘어 부디 내가 애정 하는 작가들이 무사하기를. 세간의 관심과 애정이 한 때의 국지성 폭우로 그치지 말고 사시사철 넓게 골고루 내리는 단비이기를. 세월이 내게 주었으면 하는 선물 두 가지. 어제 보다 오늘 더 잘 꿰뚫어 보는 눈과 시몬스 침대처럼 흔들림 없는 마음. 그리고 아량을 더 베풀어 준다면 계산하지 않는 순전한 기쁨 그 거면 더할 나위 없겠다.(바라는 게 너무 많은가.) 질투뿐인 허접한 희망은 파도 속에 던져버리고 이 풍랑 속에서도 첫 판화 Seashore 가 내게 주었던 조용한 해변의 기쁨을 잊지 않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