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첫 출장이 잡혔다. 밀라노 design week, 코펜하겐 3 days of design 전시들을 보고 일과 관련해 몇 번의 미팅을 하는 것. 두 도시 일정 사이 주말에 틈을 내 바롤로와 꼬모를 들르는 일정으로. 바롤로와 꼬모 얘기를 할 기회가 있겠지만 오늘은 코펜하겐으로.
코펜하겐은 첫 방문이다. 자정이 다 되어 도착한 코펜하겐 공항에서 짐을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 있자니 코펜하겐의 cast-iron bench를 경험해 보라는 공익광고가 발 밑에서 처음 방문하는 여행자의 호기심을 촉구한다.(주철로 만든 공공 벤치 디자인이 2,500개라는 건가. 역시 디자인 강국이다.)
Design festival 기간이라 어렵사리 예약된 에어비앤비 숙소에 자정 넘어 짐을 풀었다. 이 도시를 먼저 방문한 경험이 있는 일행과 함께한 터라 이동과 잠자리 걱정이 없는 건 행운이다. 여행 계획을 주도 면밀히 세우지 못하고 듬성듬성 발 길 닫는 대로 행운에 기대어 돌아다니는 성향은 변함이 없다. 호기심을 장착한 반질거리는 맘으로 이튿날 아침 시내에 있는 숙소를 나와 보물찾기 하듯 산책에 나섰다. 코펜하겐 대학이 있는 시내를 지나 분수도 지나고 조금 더 걸어 뉘 하운 운하에 들어섰을 때 돛을 접어 달고 있는 요트들이 충실한 집사처럼 조용히 떠 있는 운하 건너 오페라 하우스와 그 더 넘어 멀리 회색 굴뚝이 보였다. '저기 저 굴뚝. BIG에서 설계한 폐기물 소각장과 스키장, 전망대가 함께 있는 건물이다. 스키장은 운영하지 않겠지만 전망대를 올라가 볼 수 있겠지..' 평소 궁금했던 건물이라 동행 중 같이 건축을 전공한 선배에게 함께 가 보자 청하니 흔쾌히(??) 그러자 한다.
셋째 날 아침 지하철을 타고 가 일단 목적지와 가장 가까운 역(christianshavn)에 내렸다. 마침 역 근처에 있는 전시장 겸 사무실서 잡혀 있던 미팅을 짧게 마치고 전시장 직원에게 코펜힐 가는 길을 물었다. 코펜힐보다 거기까지 가는 길이 재밌으니 구경 삼아 걸어가라는 답을 듣고 구글 지도를 켰다. 3.2Km 40분 소요라...슬슬 걸어 볼만하다. 북반구임이 실감 나게 스산했던 어제의 먹구름이 걷히고 비 현실적으로 새파란 하늘에 초현실적으로 새하얀 구름, 멋진 날씨라며 걸음걸이도 가볍게 걷기 시작했다. 미리 결말을 스포 하자면 우여곡절 끝에 1시간 40여분에 걸쳐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전망대는 대관 행사로 입장 금지, 1층 카페도 건물을 찾는 이가 드문 지 영업을 하지 않고, 딱히 머물 곳이 없어 건물만 잠깐 올려다보고 오는 길엔 시내까지 택시를 탔다.
40분 여정이 1시간 40분으로 길어진 데는 가는 길에 흥미로운 가게와 전시장을 들른 탓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 판화 갤러리였다. 석판화 작품 판매, 석판화 인쇄, 액자 제작을 함께 하는 독특한 갤러리를 우연히 발견하고 넋이 팔려 들어 가 작품들을 보는 데 주인장인 듯한 나이 지긋한 남자분이 친절하게도 석판화 제작 과정을 보여 주며 안내를 해 주신다. 늘 석판화 제작 방법이 궁금했는데 바로 앞에서 그 과정을 보니 신기방기. 전시장에서 고심 끝에 맘에 드는 작품 하나 사 들고 나오는 마음이 딱지치기로 딱지 잔뜩 따 신난 아이 같다.
그리고, 작은 해프닝 하나. 코펜헬이다.
구글 지도에 목적지를 900m쯤, 10여분 남짓 남겨두고 내가 서 있는 길과 지척에 보이는 굴뚝 사이에 횡으로 긴(점점 뜨겁게 달아오르는 햇빛과 예상보다 길어 긴 보행으로 지친 눈에 500, 600m는 족히 돼 보이는) 아파트 단지가 직진을 막아섰다. 오른쪽으로 단지를 우회해 가라는 구글의 안내를 무시하고 용감하게 단지 안으로 직진, 지름길을 찾아 무식하게 10여분을 헤맸으나 실패.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와 다시 아까와 같이 오른쪽으로 단지를 우회하라는 친절한 구글씨의 안내를 얌전히 따라가려는데, 선배는 자꾸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가야 한다고 고집이다.
아닌 거 같은데... 긴가민가 뭔가 믿는 게 있나 보다 가보자. 그런데 가다 보니 가만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걷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게 뭔가 이상하다. 코펜힐이 엄청난 관광지인가? 설마 그럴 리가. 걷는 사람들,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 옷차림도 예사롭지 않다. 징 박힌 바이크 복장에 알록달록 두건. 왕년에 좀 놀아보신 분들인 것도 같고. 근데 표정은 세상 천진난만한 게 언발란스. 3~400m 갔을까. 선배가 갑자기 어이없는 표정으로 소박하게 서 있는 안내 이정표를 보다 이내 웃는다. 이정표엔 또렷하게 COPENHELL이라고 쓰여 있다. 선배는 아까 갈림길에서 이 이정표를 COPENHILL로 보고 이정표를 따라온 거였다. 허탈하게 다시 방향을 돌려 코펜힐로 향해 가는 길, 마주 오는 사람들이 다양하다. 남녀노소 춤추는 발걸음이다. 인적이 드문 코펜힐을 뒤로하고(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단지 중간에 뚫린 지름길을 발견했다.) 돌아오는 길 잡아 탄 택시 안, 기사분께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딜 가는 거냐 물으니 3일 낮밤 메탈 락 페스티벌이 열린다고. 음~ 그렇군. 남은 여행 틈틈이 선배는 내게 농담 섞인 핀잔을 들었다. 어떻게 HELL을 HILL로 읽냐고. 웃프게.
서울로 돌아와 코펜하겐의 그 유명한 락 페스티벌을 놓친 걸 후회했다. 코펜헬이 그렇게 유명한 페스티벌인지 몰랐다. 역시 주도면밀하지 못한 자에게 늘 행운이 따르는 건 아니다. 그 길로 쭉 걸어가 처음 직관 할 수도 있었을 락페 LIVE의 생생함을 느끼고 돌아왔어야 했는데. 헤비메탈 에너지 가득한 팬들 사이에 끼어 멀리서나마 열렬히 헤드뱅잉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언제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락 페스티벌을 부러 찾아갈 건가. 앞으로 50년은 더 꿋꿋이 그 자리에 있을 건물을 보자고 딱 3일만 열리는 페스티벌을 놓고 가다 돌아왔을까. 핀잔은 내가 들어야 하는 게 됐다.
살다 보면 어떤 일은 숙제처럼 하고 어떤 일은 놀이처럼 한다. 이번 출장길에 꾸꾸 전시들이 멋지고 대단하기도 했지만 그 걸 볼 때는 어쩌면 숙제하는 기분이었나 싶다. 놀이하듯 보낸 순간은 길에 놓여 있던 꾸안꾸 서로 다른 주철 벤치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던 시간. 우연히 발견한 판화 가게에서 인쇄 전 돌 위에 물감이 발리는 걸 보던 순간. 헤매며 긴 길을 파란 하늘을 이고 땡볕 아래 조용히 걷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기왕 헤맨 거 더 멀리 가 헤매 볼 걸 COPENHELL을 놓친 것이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