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가 없어도 되는 글을 위하여

갑자기 교육에 대하여

by 하루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위하여"

김영민 교수의 칼럼을 읽다가 어쩜 나랑 똑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네.


"... 그렇다고 무위도식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열심히 일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이런저런 성취도 있을 수 있겠지. 그러나 그 일을 하러 태어난 것은 아니다. 그 별 거 아닌, 혹은 별거일 수 있는 성취를 이루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성취는 내가 산책하는 도중에 발생한다...."


칼럼을 읽다가 주제가 없어도 되는 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꼭 주제나 목적이 있어야 글이 되나. 물론 상업적인 글쓰기 또는 학문적인 글쓰기는 주제가 있어야 마케팅도 할 테고 학문에도 이바지할 테니 주제나 목적이 필요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글쓰기는 산책과 비슷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쓰다 보면 가끔은 뜻하지 않게 좋은 글이 될 수도 있지만 그저 글을 쓰는 시간이 소중한 삶의 일부가 되는 거. 그게 다다.


하루를 지내다 보면 포도송이처럼 알알이 주렁주렁 열리는 생각들이 있다. 예를 들면 오늘. 퇴근길 앞서 가는 노란색 작은 버스 뒤 유리창에 적힌 문구를 읽으며 나는 화가 났다. 왜 화가 났을까.


"세계 속의 1% 바로 우리가 주인공입니다." 어린이 통학 차량


새빨갛게 1%라고, 노란 바탕에 새까맣게 어린이 통학 차량이라고 쓰여 있는 걸 보고 신호 대기 중 사진을 찍었다.(왜 사진을 찍었을까? 범죄 수사 도중 단서를 발견한 사립탐정처럼 증거로 남겨 둬야 할 것만 같아) 아마도 학원 차량이겠지(옆이나 앞을 볼 수 없었다.). 이런 문구를 달고 활보하는 어린이 통학 차량이라니. 갑자기 화가 치민다. 아니, 부끄러운 건가. 내가 어른이라서, 저 빨간색과 노란색의 부적절한 동거를 그냥 두고 보는 어른이라서. 주연과 조연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의 경박함에, 세상의 나머지 99%를 조연으로 만들어 버리는 발상의 비루함에 속수무책인 어른이라서. 학원에 전화를 걸어 저 참을 수 없이 절망스러운 문구라도 좀 떼고 아이들을 태우고 달리라 항의하지 못하는 한심한 어른이라서 미안하다.


딸아이를 키우는 내내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부채감에 늘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하고 동시에 화가 났던 그 느낌이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학원 정보에 문외한인 대책 없는 엄마였다. 그저 유명하다는 이름만 듣고 보낸 첫 수학학원을 두어 달만에 못 다니겠다 하는 딸아이의 조모조목 불만을 듣고 학원 시스템은 아이와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일치감치 냈다. 이후엔 많은 걸 아이의 의사에 따랐다. 학원을 가든, 인강을 듣든, 과외를 하든. 본인 선택으로. 아마 아이도 힘들었을 게다. 다른 엄마들처럼 학원을 알아봐 주지도, 예상 시험 문제를 얻어오지도 못하는, 주변에 아는 친구 엄마라곤 한 명도 없는 심란한 엄마에게 비슷한 기대는 아예 접었으리라. 엄마는 엄마 일을 너는 네 일을 하자. 모르면 용감한 법이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다 저녁이면 가끔 밥상머리에서 긴 얘기를 나눴다.


시스템 안에 들어가 시스템이 요구하는 속도와 방향에 맞춰 쳇바퀴를 돌리는 걸 견딜 수 없어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무엇보다 더 다양하고 더 자유로우며 더 열려 있어야 하는 게 교육이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다. 너는 1%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네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외치며 한 곳으로 달려가게 몰아세우는 교육은 기형적이고 참담하다. 한 줄로 서기에서 벗어나 다른 선택을 하는 개인에게 많은 짐을 지우고 책임을 떠 넘기는 교육엔 미래가 없다. 한 줄로 서면 일등부터 꼴찌까지가 선명하지만 백 개 천 개의 줄을 이어 원을 그리면 등수를 따지는 게 의미 없다. 함께 힘을 합쳐 용기 내어 살아가야 하는 소중한 존재들일뿐.


지난 8월 딸아이와 연극을 보러 오랜만에 국립극장에 갔다. 햄릿.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책으로 접하기는 했어도 제대로 된 무대를 찾아가 보는 건 처음이다. 사실 연극 잘알못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직접 무대를 보고 싶었던 건 배우들과 그 배우들에게 맡겨진 역할 때문이었다. 왠지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은 그런 공연이나 무대가 있다.


무덤 파기-권성덕 / 유령-전무송 / 배우 1-박정자 / 배우 2-손숙, 길해연 / 폴로니어스-정동환 / 거투르드-김성녀 / 클로디어스-유인촌 / 배우 3-윤석화/ 배우 4-손봉숙 / 햄릿-강필석 / 오필리어-박지연 / 레어티즈-박건형 / 호레이쇼-김수현 / 김명기, 이호철


노 배우들은 주연 자리에서 물러나 조연과 앙상블로 젊은 배우들을 받쳐 주며 한 무대에 섰다. 그 무대를 보며 주연과 조연은 그 배역의 이름일 뿐 위와 아래 더하고 덜한 역할이 아니란 걸 느꼈다. 단 한 장면 출연으로도 극에서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인물임을 보여준 권성덕 배우처럼 오랜 세월 무대에서 쌓은 연륜이 빛을 발하는 노 배우들의 존재감은 젊은 배우들의 신선한 연기와 조화롭게 어울렸다. 서로를 존중하며 자기 역할에 혼신을 다 했던 무대에 커튼콜 내내 박수가 쏟아졌다.


어쩌다 보니 주제 없이 하려던 글 산책에 주제가 생겼다. 남녀가, 노소가, 빈부가, 여야가, 노사가 둘로 심하게 쪼게 져 있는 게 다 저 문구 때문인 것 같아, 기어이 1%와 99%, 주연과 조연을 나눠 놓은 저 시작이 문제의 뿌리인 것 같아.


고등학교 때 전교 석차가 학교 중앙계단 참 벽 게시판에 걸려 있던 시절, 나는 그 소름 끼치는 행위의 나비효과를 가늠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 걸 전교생이 다 보도록 걸어 두었는지 물을 길 없지만 이제는 1등부터 꼴찌까지 줄 세우는 지금의 시험 제도로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없다는 걸 안다. 나만 아는 건 아닐 텐데 너도 알고 우리도 아는 일일 텐데 도대체 누가 모르는 걸까. 우리 아이들에겐 다른 시작이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알 수 있도록, 승패 흑백 둘보다 여러 가닥 색색의 무지개가 더 아름답다는 걸 느낄 수 있도록 저 줄 세우기를 그만둬 주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등수가 없어도 목적이 없어도 되는 존재 자체로 충분한 삶을 위하여.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시인의 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