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매는 영웅

일상의 위대함

by 하루

근로자의 날 이후 대체 공휴일인 6일까지 긴 연휴. 미리 인지하지 못해 별달리 세워둔 계획도 없는 채로 느닷없이 맞게 되는 긴 휴일이 막막할 때가 있다. 늘 짜인 틀 안에서 빙글빙글 돌다 막상 뭘 꼭 해야 하는 건 아닌 시간들이 들이닥치면 느긋해지기는커녕 방학 숙제라도 받아 든 초등학생 마냥 내가 내 눈치를 본다.


뭐 재밌는 일 좀 없어? 집에서 밥 먹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거 말고 신나는 일. 직장 다니며 엿새나 되는 연휴가 그리 흔해? 새로운 걸 해 보러 좀 멀리 나가봐야 하지 않아? 그래서 다들 짐을 싸들고 어디로들 떠나는 모양이다. 지루해질 틈을 주는 건 귀한 연휴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새로 생긴 예쁜 카페나 핫한 전시라도 찾아 나서야, 거기서 그럴듯한 사진이라도 한 장 건져야, 아니면 미뤄 두었던 두꺼운 책이라도 한 두어 권 읽거나 찬란한 봄날 신록을 맞으러 산행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며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려 종종 거린다.


닷새가 지나고 하루를 남겨둔 연휴 끄트머리. 언제 다 써버렸는지 텅 빈 지갑처럼 헐렁해진 마음만 남은 밤이다. 마음에도 관성이 있어 일하다 갑자기 맞는 연휴는 막막하다가도 연휴 끝엔 그 막막함은 온 데 간데없고 휴일이 더 계속되기를 바라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 그날그날 생각난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그 사이사이를 해야 할 일들로 채우며 닷새를 보냈다. 특별할 것 없는 연휴였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게 있다면 머지않아 더 계속되기를 바라지 않아도 될 만큼 긴 연휴가 올 수도 있다는 걸 진지하게 생각한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목적지까지 좀 남아 있을 것 같던 거리가 축지법으로 확 당겨져 갑자기 당도한 느낌이랄까.


연휴 내내 무시로, 지천으로 널린 시간을 주체적으로 주체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오는가 생각하다가 떠오른 이덕무의 시 한수가 있다.


가을철 스산한 일 많아 秋序多騷屑

글공부 며칠을 쉬어버렸네 書拋數日工

나그네 기러기 추위를 몰아오고 賓鴻勾引冷

이웃집 대추는 알맞게 붉었네 鄰棗了當紅

성긴 나무에 소나기 스치더니 樹豁俄吹雨

성이 노랗다! 무지개 걸렸구나 城黃始揷虹

낫 들고 얽힌 덩굴 베면서 揮鎌除架蔓

기꺼이 김매는 영웅 되련다 甘做圃英䧺


아무 일도 없다면 없는 스산하고 단조로운 하루다. 하지만 섬세하다. 조용하고 평범한 날 가운데 가을을 알리러 온 나그네 기러기, 꽃처럼 붉게 익은 대추, 비 개고 소슬해진 하늘에 걸린 무지개가 특별하게 다가오도록 만드는, 섬세하게 생각과 시선과 애정을 기울이는 능력. 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의 원천임을, 기꺼이 덩굴을 베고 김을 매며 일상의 위대함을 몸으로 겪으며 정성껏 사는 사람이 영웅임을 아는 지혜. 이덕무의 시는 누가 시켜서 하는 일로 채워지는 시간이 아닌 내가 내 시간을 감당하고 꾸리려 할 때 내면의 섬세함과 반복되는 일상을 담담히 살아내는 정성이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곰곰이 생각하게 만든다.


이 번 연휴, 밥을 짓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개면서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건 매일 반복되는 이 일들이 사람을 살리는 살림이라는 걸. 사람을 살리는 일에 정성을 기울이고 그 가운데 매일의 즐거움을 섬세하게 느낄 줄 아는 게 귀한 능력이란 걸 늦게라도 알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그 능력을 영웅의 무기처럼 Full 장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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