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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항해사 어름 Jul 11. 2023

워라밸을 쉽게 찾는 법

워라밸을 찾는 사람들에게

 출근 시간. 일명 '지옥철'. 양복과 블라우스를 입은 직장인들. 발이 향하는 곳은 각기 다르지만, 딱 한 가지, 대부분의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표정이다. 초점을 잃은 눈과 추욱 쳐진 입꼬리. 마치 죽은 사람과도 같은 그 표정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관적이다. 직장인이 갖는 피곤함. 직장을 다녀본 자만이 알 수 있다.



 워라밸의 중요성


 여론조사기관 모노리서치에서 MZ세대 82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30 세대의 직장 선택기준에서 '워라밸 보장'이 36.6%로 1위를 차지했다. 2위와 3위는 각각 '월급성과 보상 체계'와 '정년 보장 및 근속기간'이 차지했는데, 3위인 '정년 보장 및 근속기간'이 16.3%로, 1위와 2배 가까이 차이 나는 것을 보면 정년 보장을 중요시했던 과거 세대와 분위기가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 실감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니 나를 비롯한 MZ 세대들에게 '워라밸'은 항상 따라오는 단어다. Work & Life Balance 의 줄임말인 이 단어는 말 그대로 '일'과 '삶'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아침부터 낮 5시까지의 '일'의 영역을 꾸역꾸역 마친 이후에 오는 퇴근 시간은 항상 달콤하다. 더 이상 얄미운 팀장님을 볼 일도 없어지고 남 좋자고 하는 일을 억지로 해야 할 이유도 없어지니 말이다. 퇴근 후 친구와 맥주 한 잔을 먹거나 집에서 드라마 한 편을 보는 휴식은 일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우리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


 '일'과 '삶'을 확실히 구분하는 워라밸이라는 개념은 그중에서도 '삶'이라는 것, 다시 말해 휴식을 취하는 것에 방점을 찍는 이다. 휴식이라는 것을 '삶'과 동일시함으로써 마치 휴식을 취하는 것만이 비로소 살아있음을 증명한다고 보는 것이다. 야근과 특근까지 겹겹이 쌓여있는 삶은 휴식이 없기에 '삶'이라고 볼 수 없다. 워라밸을 중요시하는 이들에게 '일'에 매몰된 삶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휴식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자기 계발의 대가로 유명한 데일 카네기는 '짧은 시간의 휴식일지라도 회복시키는 힘은 상상 이상으로 큰 것'이라며, '휴식이란 쓸데없는 시간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수면이 부족하거나 스트레스가 과다할 때 휴식을 취해주지 않는다면, 기억력 집중력이 저하되 일이나 공부의 능률이 심하게 떨어질 뿐만 아니라, 정신 및 육체적 건강에 매우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 그 어떤 면을 보더라도 휴식은 삶에서 필수불가결인 항목인 것이다.



 '삶'의 범위


 그러나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과연 휴식만이 '삶'이냐는 것이다. 통상적인 직장인 기준으로 최소 하루의 1/3 이상은 직장에서 시간을 보낸다. 직장에서 일을 한다고 해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이 아니며 늙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일을 하든 휴식을 취하든, 언제나 어디에서든 시곗바늘은 잔인할 정도로 공평하게 흘러간다.


 일하는 시간 또한 결국 삶의 일부다. 그러니 '일'과 '삶'이라는 단어로 진짜 삶을 무 자르듯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다시 말해, 직장에 있는 나도 집에 있는 나도 하나의 연속된 시간 속에 놓인 삶 그 자체인 것이다.



 죽은 표정의 비밀


 그러니 누군가 출근길 또는 직장 내에서 죽은 표정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대체로 '일'과 '삶'을 분리한 사람이며 퇴근 시간에 다시 부활하기 전까지는 '죽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생기가 있을 리가 없다. '일'로부터 '삶'을 분리해놓은 채 '일'에 속해있는 사람은 시계만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자신이 부활하기만을 기다리는 저승사자와도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에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오전부터 오후까지 이어지는 죽음의 시간을 버티고 부활의 순간은 생존 본능을 가진 인간에게 신의 축복과도 같을 것이다.


 퇴근 이후 펼쳐질 자신의 '진정한 삶'만을 기다리는 자에게는 업무가 눈에 들어올 리도 없다. 그저 시키는 일만 쳐내면 그만이고 성과나 실적은 뒷전일 수밖에 없다. 일단 시간만 보내면 월급이 따박따박 들어오니 그 돈을 자신이 부활한 후에 있을 '삶'에 쏟아붓기 바쁠 뿐이다.



 죽음을 파는 자


 그럼 그렇게 하늘에 헌납해 버린 '죽음'의 시간은 얼마만큼의 가치를 갖는가? 만약 월 실수령액이 200만 원이라면, 그 사람에겐 그 죽도록 힘들었던 30일이 고작 200만 원에 지나지 않는다. 월요일이 되기 전 다음 날 출근할 생각에 받는 스트레스와, 일을 하기도 전에 출근길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이에 더한다면 그 가치는 더욱 떨어진다.


 200만 원이 적은 월급이라고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벌어본 사람이라면 한 달에 200만 원을 버는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힘든 일인지 누구나 알 것이다. 다만, 금과옥조와도 같은 시간을 죽은 듯이 버려가며 교환하기에는 우리의 삶이 너무 아깝다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럼 대체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이 시간들이 아깝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삶을 파는 자


  어느 누구든 자신이 다니는 직장에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자신이 세운 회사도 자기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 마당에 직원 입장이라면 오죽할까? 하지만 불만을 가졌든 그렇지 않든 하나 불변하는 사실이 있다면 내가 일하는 곳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것이다.


 그저 돈벌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든, 기업의 가치가 마음에 들었든 결국 이 직장은 과거의 내가 선택한 직장이다. 그리고 앞으로 이직을 할 계획이든 근속을 할 계획이든 간에 지금 당장 서랍에 있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문을 박차고 나가지 않는 이상 나는 지금 여기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 순간 또한 내 소중한 삶의 일부라면, 더 이상 워라밸러가 그러하듯 '일'과 '삶'을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이라는 것은 마치 계란을 품는 닭처럼 '일'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 '일'을 '삶'의 반대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일'이 삶 속에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업무를 하며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배우고 직장동료 사이에 생긴 갈등을 원만하게 풀어나가는 법을 익혀야 한다. 지금 나에게 닥친 업무에는 일단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보아야 하며, 당장의 성과가 나지 않았을 때 쉽게 굴하지 말고 근본적인 문제점을 찾아 극복해보아야 한다. 이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선까지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해보아야 한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은 그 무엇보다 강력하다.


 첫 번째, 업무 성과가 쌓이고 주변 평판이 좋아지면서 월급 상승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살아있는 상태로, 자신이 마치 사장 또는 팀장이 된 것처럼, 그 일이 자기 일이라도 되는 듯 일을 하다 보면 그 회사에서 예기치 못하게 조기진급을 할 수도 있는 일이고, 그냥 이직을 위해 한 번 넣어본 대기업에 덜컥 붙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실제로 자신의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주인처럼 일하는 직원을 보고 어느 사장님이 예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두 번째, 이왕 똑같이 일하는 거, 죽고 싶은 심정으로 일하는 것보다 살아있는 상태로 일하는 것이 훨씬 덜 괴롭다. 설사 자신이 승진이나 이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일을 삶의 일부로 품는 것만으로도 삶은 활력을 되찾을 것이다. 열심히 일해본 자는 휴식 시간을 귀하게 여기며 가치 있게 쓸 줄 안다. 또 일하는 것이 기대가 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내일이 월요일이라서 또는 아침 출근길이라고 해서 괴로워할 일도 없다.


 세 번째, 일을 열심히 하면서 얻게 될 다양한 경험들은 우리가 그토록 원했던 '자아실현'의 일부다. 나 자신이 사회생활 및 업무추진에 있어 비상한 능력을 갖게 된다면 나에게 주어진 권한은 더욱 많아질 것이고 이를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더 많이 시도해 볼 수 있다.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과 관계를 풀어나가는 것을 배우는 게 자신의 꿈을 실현함에 있어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설명이 필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차피 시간은 가는데 굳이 스스로 괴로움에 가둘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이왕 출근하기로 했고 일을 하기로 했다면 소극적인 것보단 적극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보단 긍정적인 것이, 비관적인 것보단 낙천적인 것이 스스로에게 훨씬 좋다.



 삶을 더욱 단순하게


 워라밸을 찾는 것은 어렵다. '일'의 비중을 높이자니 '삶'의 질이 떨어지고, '일'의 비중을 낮추자니 '삶'을 위한 돈이 너무 퍽퍽하다. 어쩌면 이건 어려운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단어의 의미부터 잘못된 것이라면 말이다. '일'을 내 삶의 일부로 치환할 때, 일을 위해 야근을 자처하는 것도 아깝지 않으며 일을 쉬고 휴가를 보내는 것도 눈치 보이지 않는다. 내 삶이 '일'을 품었을 때, 일을 위해 공부를 더 해보는 것은 그저 즐거우며 일을 끝마치고 취하는 휴식은 더욱 달콤하다. ''과 '' 사이의 균형을 찾지 말고 삶 속에 '일'을 품어보자.


 " 어쩌다가 내 삶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 이 회사에 쏟아부었던 내 시간들이 너무 아깝다." 가끔 이런 말을 꺼내는 사람들을 볼 때면 너무 안타깝기 그지없다. 설령 지금 상태가 내가 원하던 최상의 상태가 아니라고 한들 과거의 어린 나는 지금에 오기까지 그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거의 나를 깔아뭉개는 것이며 지금의 내가 형편없다고 자처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내가 몸담고 있는 직장에서도 이런 사람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8시간씩 일을 하는 지금의 환경을 고려하면 그렇게 말하는 걸 아예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똑같은 환경 속에서도 그 누구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이직이든 승진이든 더 나은 삶을 향해 차근차근 꿈의 벽돌을 쌓아간다. 삶의 반절을 죽은 채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살랑이는 풀과 나무가 생동하는 초원 속 한 마리의 사자가 될 것인가? 그건 오로지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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