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2살이 된 이혜진은 행복한 여자였다.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던 중 만난 한 남자와 순조롭게 연애하고는 3개월 전 쯤에 식을 올렸다. 혜진의 신랑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키 크고 잘생기고(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일 수도 있지만) 이해심도 넓고, 무엇보다 혜진의 생각과 행동을 아낌없이 지지해주었기 때문에 혜진은 이보다 더 만족할 수 없었다. 시가 부모님들도 좋으신 분들이었다. 드라마나 인터넷에 나오는 이야기는 남 이야기인 듯했다.
9월의 어느 일요일 늦은 오후, 혜진은 신랑과 소파에서 뒹굴 거리다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붙박이장으로 향했다. 그동안 소파에서 미동 없이 누워있던 신랑 앞에, 그녀는 진주색 저고리와 살구색 치마가 고운 신부 한복을 옷걸이 채로 들고 나타났다.
“자기야. 차례 지낼 때 이거 입을까? 근데... 음..." 혜진은 잠시 뜸들였다. "아침에 일하고 한복까지 입을 시간이 있겠...지?"
그녀가 치마를 바스락 하고 만지작거리자, 신랑은 소파에서 일어나고는 와이프를 사랑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입자. 어머니한테 말씀드릴게.”
“아침에 시간 없으면 어떡하지?”
“괜찮을 거야. 나도 자기 많이 도와줄게.”
혜진의 손에 붙들려있던, 살굿빛으로 부드럽게 사각거리는 옷감이 문득 차가워졌다. 엄지손가락 지문이 닳아 없어지는 것 같은 시린 느낌은 이내 팔을 타고 올라가더니 머리에 도달하고는 온몸으로 퍼졌다. 이내 그 시린 느낌은 언어로 배출되었다.
“자기가... 나를... 도와준다고?”
2주 뒤 혜진은 시가 거실 한켠에서 튀김옷을 입힌 새우를 팬에 올리고 있었다. 그 옆에서 신랑은 팬 위에서 연신 거품을 뿜어대는 새우, 깻잎들을 옮기고 뒤집고 있었다. 굽은 허리가 아파질 때쯤, 그녀는 시어머니의 부름에 가스레인지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탕국이 한 솥 끓고 있었다. 시어머니의 워딩은 끓고 있는 거품만큼이나 빨리 지나갔다. 전임자의 인수인계란 이런 것이다. 어머님이 웃으며 혜진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렸다.
“혜진이가 이해가 빠르네. 앞으로 하다보면 더 잘 알게 될기다. 그라고, 우리 기준이도 어릴 때부터 많이 해 와서 잘 안다. 기준이가 니 많이 도와줄기다. 걱정 말그라.”
2주 전 신랑의 '도와준다'는 말에 느꼈던 시린 느낌의 이름은 이질감이었을까...?
아니, 생각하지 마. 지금은 생각하지 마.
지금 해야 하는 것을 하자.
“감사해요, 어머님.”
그 날 저녁은 온 집안의 불이 일찍 꺼졌다.
혜진은 신랑의 총각 때 쓰던 방에 누워 바깥 빛에 반사된 어두운 천장과 창문, 그리고 옷장에 단단하게 걸려있는 신랑신부 한복의 희미한 실루엣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혜진은 옆으로 돌아누워 옆에서 쌔근 쌔근 자고 있는 신랑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넘겼다.
내일 아침에는 오늘 하루종일 준비했던 음식을 꺼내고 정성스레 차례상을 올릴 것이다. 제사상 앞에서 옷차림을 바로 한 시아버지와 남편의 모습을, 혜진은 부엌 한켠에서 어머님과 함께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결혼 후 첫 명절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