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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냥냥이 Nov 11. 2020

그녀의 까만 슈트

그 날 그녀가 입고 있던 옷

TV에서 보던 그녀가 온다는 소식에 사무실은 근 며칠 동안 축제 분위기였다. 여왕이 온대요, 드디어 우리도 실물 영접하는 건가요. 나도 내심 그녀가 궁금했지만 촉박한 기한, 매일 쏟아지는 업무 연락에 애써 관심 없는 척했다. 나의 일만으로도 바빠 죽겠는데 TV로 보던 그 모습이 그 모습이 아니겠어- 그러면서 딴청 피우던 사이 그 날이 왔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TV 속 그녀가 오는 날.

기념식을 위해 잠시 들른다고 하여, 회의장 앞에는 기자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 날 나의 업무는 MOU 체결 기념사진 찍을 때 내빈이 앉을 의자 몇 개를 갖다 놓는 일이었다. 의자를 갖다 놓기 위해 1시간 동안 대기 좌석에 앉아있었다.


그러는 사이 웅성이던 소리가 소란으로 일순간에 바뀌었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쾅쾅쾅- 일제히 바닥을 울렸다. 그녀가 온 것이었다.


TV에서나 보던 그녀는 긴 생머리, 하얀 피부, 혈기 도는 발그스란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는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눈은 안 웃는데 입만 웃는 모습이 어쩐지 내가 그동안 TV에서 보던 모습과 비슷하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우아한 자태로 춤을 추듯, 사장 옆 자리 그녀의 명패가 놓인 곳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까만 슈트를 입고 있었다. 검은 재킷과 바지에서는 손목뼈와 복숭아뼈가 언뜻 드러났다. 그 슈트는 어쩐지 광이 났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에 반사된 슈트의 표면은 부드러웠으며, 직물은 탄탄해 보였다. 멀리서 비행기를 타든 차를 타든 앉아있었을 텐데도 주름 하나 없이 탄력 있게 빛나고 있었다. 검은 슈트 안으로 입은 블라우스에는 보헤미안 내지 오리엔탈 풍의 채도가 약간 낮은 버건디 색 실낱같은 무늬들이 기하학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녀의 블라우스는 내가 그토록 사고 싶었던 영국의 식기 브랜드 중, 아시아틱 피전트 레드 찻잔세트와 영락없이 같았다. 그녀는 이리저리 어깨를 구부려 인사하고는 의자를 끌어당겼다.


나는 그녀를 보았다.

분명히 나는 어느새 또 쌓여있을 업무 연락과, 취합해야 할 자료와, 데드라인과 관련 부서의 부재중 전화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는데, 회의장에 있으면서도 온통 딴청이나 부리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내가 그녀의 맞은편 즈음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녀를 내내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말해 뭐하랴?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녀 옆에 앉아있는 우리 공장 사장도 나름 유명한 사람인데 그녀 옆에 있으니 평범한 아저씨로 변해있었다. 나는 그녀가 흡사 마법을 부리기라도 한 줄 알았다. '하필 내 옆에 앉은 인간들아, 평범해져라! 펑! 펑!' 그녀 옆에 앉은 내로라 하는 사람들의 온갖 지위와 타이틀은 일순간에 떨어져 나가버렸다.


그러고는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가 입은 옷을 보았다.

아웃렛에서 급하게 산 꽃분홍 셔츠와 버건디 롱스커트, 그 위에는 가벼운 회색 코트가 덮여있었다. 그리고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그녀가 입은 검은 슈트를 보았다.


아,

역시 블랙이 무난한가?

왜 나는 검정을 사지 않았는가?

왜 나는 옷 살 시간이 충분히 없었는가-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아무거나 집어서는 이렇게 안 어울리는 꽃분홍을 입고 와서는 저분들이 앉아있을 의자를 빼기 위해 엉거주춤 자세로 눈치나 보며 대기하고 있는 건가?

왜 나는 지금 뚱뚱한가?

왜 나는 빠졌던 살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가? 야근할 때마다 시켜먹는 치즈떡볶이가 문제인가, 아니면 집에 가서도 도저히 운동할 시간마저 안 나는 내 무능력함이 문제인가?


나는 내 주위를 둘러보았다. 행사 담당팀 외에는 딱히 옷을 차려입은 사람이 없었다. 원래 우리 사무실 분위기가 그렇다. 검은 슈트란 업무 보고하러 갈 때나 입는 것이다. 괜찮아,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그럼에도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니,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살이 찌고 굽은 어깨가 내 시선 안으로 걸쳐 들어왔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열심히 의자를 옮기다 보니, 휴대폰으로 힐끔힐끔 사진을 찍고 있다 보니, 그렇게 그 날 행사는 끝났다.


"우리 과 사람들 모이세요!! 빨리빨리 모이세요!!"


담당 팀장님의 말에 우리는 우르르- 그녀의 주위로 모였다. 나는 약간 외곽에 자리를 잡고는 남들과 함께 손가락 하트를 만들어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신나 보이는 것은 우리였다. TV 속 그녀는 여전히 입만 웃고 있었다. 그녀는 제 할 일이 끝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 우리는 그녀에 대해 얘기했다. TV랑 실물이랑 똑같네, 아니 TV보다 훨씬 예쁘네, 미모가 미쳤네, 그리고 생각보다 잘 웃네, 안 웃네, 안 웃는 게 아니라 우리 누구는 원래 성격이 그런 거라며.


기자들이 빠져나간 지 오랜 텅 빈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누군가가 말했다.

"근데 슈트 빨 장난 없더라. 역시 연예인이야."

나는 대답했다. 아주 무심하게.

"저 분은 골격 자체가 달라요."


골격이 달라요.

골격이 달라서 슈트 빨도 장난이 아닌 거랍니다.


나는 튀어나온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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