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 by. 박찬욱
최근 뉴스를 보면 사적제제에 대한 기사가 많이 보인다. 법이 해결해 주지 못해 개인적으로 해결한다. 그래야만 억울한 누군가의 한(恨)을 풀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복수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그렇다고 용서를 하기에는 매우 힘들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말한다. 죽어가는 나의 영혼을 구제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하지만 용서는 어렵고, 복수는 쉽다. 과거의 내가 받아온 수많은 폭력의 기억을 되짚는다. 언제나 슬프고, 무력한 나를 겪었던 시절을 되돌려준다. 그 끝에 허탈감 혹은 맹렬한 슬픔이 올지라도 나는 복수를 통해 구원을 원한다. 그것이 설령 나를 죽이는 일이라도 말이다.
이러한 관점은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늘만 대충 수습하는 남자 오대수의 입장을 보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대수가 우연히도 감금되어 15년을 감독에서 보내게 된다. 범죄자로서 들어간 감옥이 아니다. 그저 사적인 제제를 위한 감옥이다. 그곳에서 자신이 과거에 일으켰던 문제와 상처를 기억해 낸다. 하지만 그의 상처는 흉터로 변한다. 울고만 있던 자신의 감정을 지운다. 대신 누군가를 향한 분노로 나를 성장시킨다. 복수는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1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오대수는 밖에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것은 15년간 자신을 망가뜨린 인간을 찾아 복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복수의 대상은 뚜렷하지 않다.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에 대한 반복적인 질문을 던져도 답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마치 안개로 뒤덮인 도로의 지평선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 ‘누가 나를 감금시켰는가?’ ‘왜 그랬을까?’에 대한 단서도 없는 불안한 복수는 오대수라는 인간에게 흥미를 가지게 하면서도 동시에 불안을 느끼게 만든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의 폭력의 연결되면 복수를 당했나를 생각한다. 내가 혹시라도 상처를 준 사람이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그리고 복수의 대상이 된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향한 연민하는 감정을 새긴다. 내가 일으킨 것은 사소한 문제였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 나를 괴롭혀야겠냐는 자기 방어적인 기제도 깔린다. 그것이 오대수를 만들었다. 자신이 해온 수많은 악행의 관계성은 무시한 채 말이다. 그 점은 오대수라는 인간이 복수를 자행하고자 하는 폭력의 피해자였다. 동시에 누군가에게 끔찍한 일을 당할 만큼 악행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두 시선은 복수를 하는 나를 흐릿하게 만들어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일까 영화 올드보이의 복수는 뜨겁지 못하다. 오히려 복수라는 미묘한 관계를 맺게 된 두 인물 오대수, 이우진의 세계가 더욱 비참하게 느껴진다. 창작물은 복수의 시작과 끝을 통쾌한 서사로 맺는다. 복수를 시행한 대상에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같은 감정을 이끌어 낸다. 하지만 올드보이는 그와 다르게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다. 매 순간 나를 괴롭힌 자를 죽이기 위해 살아온 두 남자의 인생은 그렇게 무너진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복수를 한다고 행복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누가 복수의 대상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모호한 관계를 보여주며 우리가 생각하는 복수의 이면을 상기시킨다.
나에게 고통을 안겨준 것이 사람에게 복수한다고 나의 분노가 해결될까? 아니다. 나를 외면한 사람들, 나에게 화해를 요구한 이들까지 나를 괴롭힌 대상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래서 나의 복수는 정확한 초점이 없이 흔들리는 시야를 통해 조준할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의 오대수처럼 복수의 대상이 죽은 피해자일 수도 있다. 혹은 이우진이 시행했던 복수처럼 오대수의 가족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이우진은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해하여 스스로에게 복수를 실현한다. 모두가 정확하지 않은 복수의 대상들 뿐이다. 그렇게 불안정한 복수의 끝에 나는 끌어 오르는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생각한다. 윤리적인 사고를 하는 인간이 아니라 본능으로 무장한 괴물의 감정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