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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Jun 20. 2023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를 살해하며

레드 by. 존 로건

연극 레드 (2022)


모든 예술의 시작은 누군가 역사적 발자국을 남긴 순간 이루어진다. 항상 발자국이 찍힌 예술에는 의미를 부여된다. 하지만 발자국은 영원하지 않는다. 시대를 넘어 운명에 따라 거인의 발자국은 매몰된다. 그리고 새로운 형태의 거인들이 기존의 예술의 권위를 대신하여 자국을 남긴다. 누구나 예외는 아니다.  수 없이 이름을 날린 예술가은 역사의 뒤편에서 살해당했다. 살인의 가해자는 바로 자신의 예술을 배우고, 습득하며 자신을 존경한다고 말하던 어린 예술가였다. 아버지처럼 존경하며 따른다는 말을 입 속에서 사라진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 왕처럼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모든 것을 강탈한다.

  

연극 레드는 미국의 추상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의 예술 인생의 말년을 다룬 연극이다. 특히 연극은 구세대와 신세대 예술의 전환기를 집중한다. 연극은 무대 위에서 수 만 가지의 논쟁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넘어서 마크 로스코가 가진 예술론을 정의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그 시대에 걸맞은 예술이 있는 만큼 점차 로스코의 운명의 막바지가 다가오는 과정을 통찰시킨다. 동시에 마크 로스코가 끝내 사라질 것이라는 자신의 시한부 인생에 대한 고독도 같이 느낄 수 있다. 항상 페인트로 가득한 틀어박혀진 작업실에서 자신의 그림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던 인간의 열의 없는 붓질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의 비참한 슬픔은 특히 젊은 조수 켄의 등장과 끊임없는 대화로부터 더욱 강조된다. 처음에는 마크 로스코라는 인간의 뒤를 쫓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극이 후반부로 갈수록 동시에 로스코라는 존재를 넘어서 새로운 개척을 위한 준비를 시도한다. 만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시작, 앤디워홀의 미술 시장의 변화,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의 역설까지 모든 것이 그에게는 자유로운 시작이었다. 아직 멈추지 않고, 새로운 예술을 불태울 수 있는 젊은 이의 바람직한 태도는 연극에서 정점을 다가오게 만들었다. 동시에 예술적인 한계를 쥐어짜는 아버지 마크 로스코라는 예술가와 대비시켜 운명의 척도를 끝내고 다가올 미래를 보여준다. 

  

그래서 마크 로스크의 무차별한 독설과 분노를 표출해도 관객은 무대 위에서 휘몰아치는 그의 발버둥에 슬픔을 느낀다.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막바지처럼 궁지에 몰린 운명에 처한 가냘픈 인간의 마지막 발버둥 같았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테베의 왕이 되었지만 끝내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 존재. 마크 로스코도 어쩌면 아버지를 죽인 대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모든 예술을 쏟아붓고 이루어낸 결과물은 가치적으로 엄청나게 풍요를 주었다. 하지만 새로운 젊은 예술가의 탄생과 기술의 진보 등을 고려한다면 왕의 자리는 결코 행복하지는 않다. 붓질 한 번에 대중을 환호할지라도 자신은 무너져간다. 그렇게 무너진 나를 죽일 또 다른 오이디푸스가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만큼 예술은 정적이지 않다. 대중이 볼 때 예술의 기준점이 되는 것은 미술관에 있고, 그것으로 받아들이기에 느끼기는 어렵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거인들의 발자국을 지우고 자신의 위치를 세우고자 수많은 시도로 아버지를 죽이려고 시도해야만 한다. 오늘날에 화석이 되어 박물관에 새겨진 그림의 의미를 지우고자 말이다. 그래서일까 개인적으로 연극을 보고 났을 때 한 인물이 떠올랐다. 바로 그라피티 예술가 뱅크시였다. 뱅크시는 연극 '레드'라는 작품의 주제에 가장 큰 예시라고 생각된다. 


그가 기존의 미술시장을 뒤엎었던 행위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뱅크시는 우리가 직접 미술관을 찾지 않아도 볼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나 현대 미디어 시대에 예술은 기존처럼의 구도에만 사로잡혀 있는 것을 거부했다. 벽화를 그려도 사진과 영상으로 전 세계인들이 그림을 보게 된다. 누구나 복사하고, 패러디를 섞으며, 또 다른 그림으로 해체되어 재구성된다. 뱅크시는 이러한 현상을 받아들인다. 과거에 마크 로스코의 예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순수한 대중을 찾으려는 태도는 어쩌면 이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뱅크시 또한 과거의 아버지들이 해온 결과물을 부수고, 기존의 관습을 지웠다. 동시에 자신의 예술적 순수함을 위해 싸웠다.

  

물론 이러한 삶을 이룬 예술가는 드물다. 아버지를 죽이기는커녕 이름조차 남가지 못한 예술적 한계를 느끼며 좌절하고 포기한다. 하지만 마크 로스코가 끝도 없이 추구했던 레드를 향한 끝없는 집착이 순간을 만든 것처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언젠가 이룰 수 있는 순간에 온다. 그에게 허락받는 것이 아니라 쟁취해야만 한다. 그리하였을 때 나의 예술을 마크 로스코가 추구했던 진정한 레드를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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