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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야 Aug 05. 2021

히틀러가 죽었고, 나치는 기억된다.

영화 다운폴 by. 올리버 히르비겔

다운폴 (2004)


히틀러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나서야 세계 2차 대전의 막이 접어들었다. 독재자이자 잔혹한 학살자이며, 전쟁에 책임이 있던 그가 자살을 하던 그 시간을 영화는 묘사한다. 소련이 베를린을 향해 공격해오는 압박 속에서 그들은 무력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를 운명에 겁을 먹었다. 그리고 지하 벙커에서 망상과 좌절을 느꼈다. 제3 제국을 통치했던 히틀러의 시대는 그렇게 끝난다.


영화 다운폴은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킨 장본인 히틀러의 인생을 보여준 영화이다. 히틀러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할 수 없다. 그의 정치 초창기 인생부터 파란만장했던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죽음을 앞둔 과정이었지만 히틀러는 자신의 본모습을 모두 보여준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허상을 멈추지 않는다. 마치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한 비장함을 항상 품고 살아가는 과도한 배우처럼 보일 정도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버틸 수 없을 정도이다. 


히틀러 본인은 이미 국가라는 사회에 몰입된 존재이지 국가 자체가 아니다. 내면이 모두 드러나면 아무것도 없는 껍데기뿐인 인간이었다. 그래도 독일과 제3제국은 그에게 홀린 듯 그를 따랐다. 종교로 추앙된 충성은 2차 대전을 여기까지 이끌어 올 수 있던 힘의 원천 같다. 비록 히틀러의 충성을 거부하거나 개인적인 신념에 따라 의지를 바꾼 사례도 있다.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인식은 할 수 있었다. 그 시대가 얼마나 광기의 차있었는지 말이다. 


인간은 과연 히틀러는 그대로 믿었을까? 히틀러의 행동과 말투, 카리스마에 홀려서 히틀러를 믿은 것일 수도 있다. 혹은 군대를 통솔하고 전쟁을 통해 독일의 새로운 영광을 차지한 모습에 매력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히틀러의 세뇌 작업에 홀려버린 독일 국민의 한 사람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히틀러를 결국 믿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만들어낸 독일은 거대한 국가가 되었다. 영토와 영해와 영공을 지키고 정부를 수립한 국가라는 형식이 아니다. 독일이라는 사회에 속한 국민 모두가 국가가 되었다. 


하나의 생각과 믿음으로 그들을 뭉치게 만들었고 전쟁에 흐름에도 동요하지 않도록 세뇌시킨다. 그렇게 탄생한 비이성적인 제국은 히틀러의 잔혹한 야망에 손을 들어주었다. 나치의 시대가 찾아오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치의 시대를 거부한다. 그 시절에는 나치의 힘을 우세하였고, 나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나치의 위상에 홀려서 따랐다는 변명으로 가득하다. 스스로가 나치가 된 것이 아니다. 나치의 압박과 세뇌로 인한 결과라며 부정한다. 


하지만 인간이 가진 이성적인 선택을 통해 나치를 거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그런 결과물이 탄생했다. 그러한 파시즘을 많은 사람들은 독재자 한 명에게 범죄사실을 몰아붙인다. 히틀러라는 존재의 잔혹성을 들먹인다. 그래야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전후 사회를 복구하는데도 많은 도움을 준다. 하지만 전쟁 직후의 결과는 변할 수 없다는 점 또한 알아야 할 것이다. 결국 히틀러라는 존재를 대다수의 시민이 묵인했다. 혹은 적극적으로 그를 믿고 따라간다. 


그렇게 결과로 탄생한 나치즘은 독재자 한 사람의 위상처럼 보이지만 대다수의 시민이 기반을 쌓아 올린 원인들의 일부였다. 영화 다운폴은 바로 히틀러의 무력함 속에서도 믿고 있는 맹목적인 충성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있다. 자신들이 지지해서 쌓아 올린 결과를 믿지 않고 싶어 한다. 원인이 되었다는 자부심과 비참한 결과의 괴리감에 그들은 히틀러를 더욱 맹목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다른 한편으로는 원인이 되어도 후회하며 히틀러를 거부한 사례도 있었다. 그렇지만 인간은 나약했다. 


결국 영화 다운폴은 히틀러의 죽음이 가장 중요한 지점이지만 동시에 파시즘에 대한 영화였다. 영화는 집단 광기로 일으킨 사회적인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히틀러의 몰락이 전부가 아니라 파시즘이라는 시대를 철저하게 세뇌하려고 했던 자들의 이야기였다. 우리는 과연 그런 사회적 맹목화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말에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또 다른 파시즘은 항상 일어나며, 문제를 야기한다. 


수많은 정보의 바다를 가진 현재에도 틀림없다. 특히나 사회의 정서를 벗어나서 반대를 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파시즘의 몰락과 결과를 알고 있기에 조금은 선택의 폭을 두지 않을까 싶다. 히틀러를 의지했던 제3 제국은 끝내 몰락했다. 그러나 나치는 기억되었다. 그렇게 관객들에게 파시즘의 의미를 상기시켰다는 점에서 영화의 역할은 다 했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시대를 다시 마주했을 때의 역할이다. 우리는 파시즘을 거부하며 그런 비극적인 현실을 보지 않을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히틀러는 죽었지만 나치는 기억될 것이다. 명백한 사실임을 명시하고 있어야 한다. 



점수 : 4.0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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