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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Dec 10. 2020

그 학기가 끝나갈 무렵

그 학기, 실패라고 생각했다.(3/3)

(1편) https://brunch.co.kr/@subeenist/78

(2편) https://brunch.co.kr/@subeenist/79


위로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매 학기 말 수업 시간에는 항상 칠판에 몇 가지 질문을 던져놓고, 학생들이 이면지에 답을 쓰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마지막에 '국어 선생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라는 질문에 그 반의 한 학생이 이렇게 적은 것이었다.


-애들 말도 잘 안 듣는데 끝까지 이끌어주시는 모습 보고 감동받았습니다.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이 말을 읽었을 때, 정말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특히, ‘감동’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크게 다가왔다. 이 학생이 그동안 나의 노력들을 조용히 다 보고 있었구나, 그리고 그것에 ‘감동’을 받았다고 말해주는구나. 전혀 기대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부끄럽게도 눈물이 찔끔 날 뻔했다.


글쎄... 지금 다시 보니, 별거 아닌 짧은 문장일 뿐인 것 같기도 한데. 그때의 나에게 그처럼 큰 위로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학생이 툭 던진 그 말 한마디가, 헛된 삽질을 하는 것 같았던 나날들에 의미를 부여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런 변화를 이끌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소용없는 일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나의 노력을 분명 다른 학생들이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분명 좋은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확인시켜준 것이 그 말 한마디였다. 그 외에 이런 말들도 있었다.


-저희 반 친구들이 다 장난을 너무 심하게 치는 친구들이라 가끔 도를 넘었을 때도 있었는데, 그래도 끝까지 상냥하게 국어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차별적 단어나 발언이 잘못됐다고 말해주셔서 좋았다. 생각 없이 입에 필터를 달지 않고 말하는 학생들을 더 지도해주셨으면 좋겠다.


조용히 속으로 나를 응원해 왔던 학생들의 말이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도는, 학생들도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누구나 자기 가치를 지키고 싶다는 생각과 방어 기제들이 있어서, 가끔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애써 부정하곤 하지만.


어쨌든 선생님으로서도, 어른으로서도, 몇몇 학생들의 심한 장난과  좋은 말들을 지적하고 그러한 언행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같은 공간에 있는 학생의 입장에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울까. 그러니 내가 그동안 지도해왔을 ,  모습을 보면서 연대감을 느끼는 학생도 분명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에 있어 '성공과 실패' 더욱이 '성과'라는 단어가 얼마나 무색하며, 알 수 없는 것인지. 실패했다고 생각한 그 순간들에도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분명 가만히 나를 지켜보면서 힘을 얻는 학생들도 있었다는 것을. 그 학기가 끝나갈 무렵, 나는 알게 되었다.




게다가, 지금 보니까 그 반에서 항상 자던 학생 중에 한 명이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선생님 맨날 수업시간마다 자서 죄송해요. 그래도 여기 와서 정신 차리고 있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렇구나. 죄송함을 느꼈었구나. 노력하고 있구나.


이름표를 붙이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너는 이런 학생이야, 여긴 이런 반이야. 그런 거 말고, 본인이 스스로 이름을 써넣을 수 있게 그동안 붙어있던 이름표를 떼어주는 일, 그 이름표를 떼고 학생들을 바라보는 일. 어렵지만 끊임없이 시도해볼 만한 일이 아닐까.




-애들 말도 잘 안 듣는데 끝까지 이끌어주시는 모습 보고 감동받았습니다. 잘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몇 년 뒤, 이 글을 썼던 학생은 고등학교에 갔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길에 그 학생을 다시 마주친 적이 있다.


서로를 알아보고 몇 마디 인사를 나누다가, 나는 그 학생에게 그때 네가 어떤 말을 했었는지, 그 말이 그때의 내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를 말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전하고 싶었다.


그때 내 말을 듣고 학생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가 기억나지 않는다. 부끄러워하며 민망한 웃음을 지었던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어서 의외라는 놀란 눈빛을 보였던가, 덤덤했던가,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었던가,  그도 아니면 다시 감동받은 얼굴을 보였던가.


본인이 그런 글을 썼었다는 것도 아마 잊고 있었을 텐데. 내가 고마웠다고 말한 것도 언젠가 잊게 되더라도, 예전에 그냥 좋은 마음으로 한마디 감사함을 표현했던 것이 다른 사람에게 정말 큰 위로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또다시 그런 마음이 돌고 돌아 그 학생도 힘을 얻는 순간이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그 학생에게 정말 고마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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