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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Apr 03. 2023

번역가의 미래

화가(家)와 번역가(家)

거의 한 달 넘게 진행해 오고 있는 장기 프로젝트도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처음으로 맡는 장기 프로젝트이다 보니 좋은 결과를 내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 페이스 조절에 실패해 몸에 무리가 왔었는데 다행히 요새는 전처럼 일이 몰아 치지 않아 잠시 약해진 몸을 추스르는 중이다.


최근 AI의 무서운 성장세에 번역 일이 많이 줄어들지 않았냐고 주위에서 많이들 묻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느끼는 실제 분위기는 조금 다르다. 오늘은 그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한다.




AI 번역의 퀄리티가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 건 사실이다.

단어의 사전적 의미로만 해석을 내놓던 과거에 비해 최근에는 맥락을 고려한 해석 결과도 내놓아 종종 나를 놀라게 한다. 그러나 아직은 텍스트 전체의 번역을 온전히 AI에만 맞기기에는 시기상조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라 어느 날 하루아침에 갑자기 밥그릇을 빼앗길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데이터가 계속 축적되다 보면 이 문제도 빠르게 보완이 될 거라 생각하기에 우려가 드는 부분도 있다.


이러한 경향성의 변화 속에서 과거 번역가에게 요구되던 능력은, 앞으로 그 양상이 많이 달라지게 될 것이다. 

원문을 해석하고 그 결과를 목적어로 옮기는, 두 가지의 영역에서 높은 능력을 요구하던 과거의 패턴에서, 이제는 원문의 해석은 대부분 기계가 담당하고 번역가는 이 결과물을 에디팅 하는 수준의 역할로 축소될 것으로 예상된다. 아마 그렇게 되면 당연하겠지만 요율도 과거보다 많이 낮아지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여기에는 낮아진 진입장벽으로 인한 번역가의 공급 과잉도 한몫하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그림자가 진다는 건 빛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가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도 분명 있다.




첫째, 같은 시간 내에 처리할 수 있는 일의 양이 늘어난다.

원문을 해석해야 하는 공수가 줄어드니 남은 에너지를 결과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 처리할 수 있는 업무량이 늘어난다. (물론 여기에는 1차 해석이 어느 정도 정확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둘째, 번역가는 오역의 부담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다.

번역가에게 오역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자 그럼에도 되도록 피해야 하는 딜레마이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해석의 영역을 AI가 안정적으로 커버하게 된다면, 에디팅이 주 업무가 된 번역가는 상대적으로 이러한 리스크의 부담을 덜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가끔 발생하는 AI 번역 품질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 실력 있는 기성 번역가의 입장에서는 클라이언트와의 협상을 통해 더 높은 이점을 취할 수도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해 볼 수 있다.


셋째, 수요가 확대된다.

앞으로 미래의 전 세계적인 주 수출품은 플랫폼과 콘텐츠가 될 것이다. 

지금도 플랫폼은 기업이 제공하지만, 전 세계 수많은 개인들이 그 안에 있는 콘텐츠를 채우고 있다.

유튜브와 인스타 같은 걸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러한 콘텐츠는 국경을 넘어 소비되는데,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이러한 콘텐츠의 수출이 전보다 더욱 용이해질수록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콘텐츠를 수용해 줄 독자층을 더욱 넓히려고 할 것이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원문을 해석하고 자연스러운 언어로 바꿔 줄 수 있는 번역가의 수요 역시 더욱 늘어나게 되지 않을까?




전통적인 번역가의 역할은 달라지겠지만 그 수요와 중요성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1888년, 버튼만 누르면 실사와 똑같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코닥 필름 사진기가 나오면서 사람들은 화가라는 직업이 사라질 거라 예상했다. 왜냐하면 당시 실사와 똑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대세적인 화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드러난 결과는 화가의 멸종 대신, 화풍의 발전과 다양성의 확대였다

세태의 변화에 적응한 화가는 틀에 박힌 방향을 바꿔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성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리고 나는 번역의 미래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문제는 변화에 적응할 준비가 되었는지를 스스로에게 되묻고, 개인이 변화의 시기를 잘 견뎌나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데 있지 않을까라고 감히 말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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