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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사 Oct 19. 2020

인사담당자입니다.

보석과 구두를 팔아요.


자동화 장비 제조 업체의 인사담당자로 살고 있다. 니 담당이 아닌 건 모두 내 담당이었던 세월을 지나 어느 정도 고정된 포지션을 가졌다. 후임도 몇 생기니 다리는 편하지만 마음은 막내 때보다 불편하다. 위치에 맞는 액션을 해야 할 것 같고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내려줘야 한다는 압박이 있다. 놈팽이 상사도 꼴불견이지만, 명확하지 않은 지시로 같은 일을 반복하게 하는 선임은 더 저질이다.


인사 담당자로 몇 년 살아보니 이렇게나 다양한 사람이 있는 대한민국이구나 새삼 깨닫는다. 입사 2년 차였나. 연차 결재내역을 보는데 사유가 무려 '그냥'이다. 작성자는 시스템 설계도 부족한지 마이웨이를 개척하고 계시다는 설계팀 대리님.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다. 심지어 부서 장이 별다른 코멘트 없이 결재도 해줬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멋진 연차 사유를 낼 수 있을까. 1년 후쯤 그의 이름이 적힌 사직서를 받았다. 지금쯤 어디서 뭘 하고 계실까. 저는 여전히 연차 사유를 정성껏 적어 내고 있답니다 대리님.

입사 3년 차쯤엔, 소프트웨어팀 친한 주임이 출장 다녀와서 엄청 깨졌다고 했다. 규정된 중식대가 8천 원인데 휴게소에서 9천 원짜리 돈가스를 먹었다는 게 이유다. 너 따위가 뭔데 돈가스를 먹느냐고 면박을 받았다고. 그 상황을 상상하니 듣는 나는 웃긴데, 장본인은 한이 서린 듯 사석에서도 늘 그 이야기를 했다. 이후 일 년쯤 지나서 그의 사직서를 받았다. 여러 가지 퇴사할 이유를 알뜰하게 모아둔 근로자들은 어느 시기엔가 만기 된 적금을 찾듯 모아둔 퇴사 사유를 꺼내 마지막 결재를 올리고 회사를 떠났다.


가끔 퇴사를 하고 싶다. 하지만 회사 와서 얻는 안정감이 좋다. 쌀쌀한 아침에 사무실에서 마시는 카누 한잔이 주말 감성카페에서의 휴식보다 좋다는 나를 가리켜 변태라고 했다.


서른한 살 딱 이맘쯤. 소위 핫플레이스라는 힙한 바에 갔었다. 매니저 언니의 리드로 바에 있던 대부분의 청춘남녀들이 줄 지어 서로의 어깨를 붙잡고 기차처럼 행진했다. 외갓남자의 묵직한 손이 양 어깨를 감싸 쥐었는데도 설레기보단 그 커다랗고 단단한 손으로 뭉칠 대로 뭉친 어깨 좀 주물러 줬으면 싶었다. 증후군의 집합체가 된 오른쪽 상체의 통증이 '너도 퇴사해야 되지 않겠니' 하고 압박해 왔다. 목과 어깨를 타고 내려와 팔꿈치와 손목, 새끼손가락까지 저릿저릿한 통증이 모서리만 보면 어깨를 비비게 한다. 하아. 쉬어야지. 연차라도 길게 한 번 낼까. 쉬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지만, 정말 쉬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퇴사 욕구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시기가 있다. 그럴 땐 계시처럼 꿈을 꾼다. 꿈속의 사무실엔 내 자리가 없다. 잠에서 깨고 한참이나 서글픈 여운이 남는다.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는 내 책상이 너무 반갑다. '3,6,9의 고비'라는 얘기가 있다. 현타가 3,6,9개월마다 반복되고, 3,6,9년 주기로 퇴사 욕구가 용솟음친다는 게 노동 학계의 정설이라고. 당장의 소속감이 좋은 겁 많은 서른둘은 내년 4월에 9년 차가 된다.  사직서를 낼 용기가 함께 솟지 않는 이상 퇴사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회사만 다니자니 언제까지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까 막막하다. 개리만 남은 리쌍 같다. 길이 없다. 공부를 조금 더 해야 되나, 영어를 공부하면 안보이던 내 앞길이 좀 밝아질까. 걱정의 특효약은 공부인데, 현실안주를 즐겨먹는 나 같은 신선에겐 뜬구름 같다. 길은 스스로 만드는 자의 것이라 했고, 그 길에는 정도(正道)가 없다.


2020년 2월.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외부에서 불어온 바람길이었다. 같은 건물에 사는 세입자인데,  본인이 액세서리를 제작해 판매하는 일을 하며, 당장 하루만 촬영할 귀걸이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촬영 스튜디오는 내가 사는 곳 아래층이며 언제든 구경을 오라 했다. 입금된 보수 5만 원과 함께 손안에 뜨거운 쇠뿔이 닿은 것 같았다. 닿은 김에 힘껏 당겼고, 올해 3월 나는 간이과세자가 되었다.


본캐는 장비 제조 회사의 인사담당자. 부캐는 보석과 구두를 파는 스토어의 대표. 두 개의 역할을 하면서도 이전과 별 다를 것 없이 지낸다. 스토어는 가뭄에 콩 나듯 주문이 들어온다. 두 달 전부터는 나름 한 달 커피값 정도의 수익을 내고 있지만, 크게 집착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당장 내 앞의 탄탄대로는 아닐지 몰라도, 손 놓고 허송세월 보내고 있다는 죄책감 한 스푼 정도 내려놓고 갈 수 있는 논두렁 밭 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새로운 걸 시작한다는 기분 좋은 스트레스를 곧 다시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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