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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사 Oct 21. 2020

소처럼 일한다는 말에 소는 어리둥절하다

음매?


"먹는 게 일입니다만.."


소처럼 일한다는 표현에 당사자인 소는 어리둥절하다. 닭 알 낳을 무렵 출근해서 샛별 뜨면 퇴근하고 풀로 쑨 여물로 배 채우던 농경사회는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 21세기 소는 먹고 자는 게 일이다. 사료로 급식을 하고 나면, 후식으로 제공되는 지푸라기를 씹으며 나른한 오후를 보낸다. 놀고먹는 게 그들의 일이다. 나태한 소일 수록 무게가 나가니 값도 많이 쳐준다.


음매?


'소처럼 일한다'는 건 농경시대와 함께 막을 내렸다. 굳이 이제와 그 표현을 쓰자면 '월급루팡' 쪽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소는 고기라도 내어 주지, 월급 도둑들이 남기는 건 회사 화장실에서 눟는 똥 밖에 없다.

 

업무량은 상사가 정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 언더그라운드에서의 치열한 눈치게임 끝에 결정된다. 기세 등등하게 일을 잘하면 내 일이 된다. 착하면 호구처럼 내 일이 된다. 근면 성실해도 내 일이 된다. 24시간이 모자라게 내 일이 된다. 이렇게 반 자의적, 반 타의적으로 루팡이 탄생한다.

반면 의욕은 앞선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 일을 하고 싶어도 책상만 쳐다보고 있는 슬픈 루팡도 있다. 슬픈 루팡들은 결국 이직을 한다. 이직하는 주기가 짧은 사람들이 있다. 사유는 사업의 확장, 커리어, 경영악화 등 다양하지만 업무의 과다가 태반이다. 점찍듯 돌아다녔던 모든 회사들이 스타트업도 아니었고, 부서에 혼자 배정받은 것도 아닌데. 왜 유독 그에게는 과다한 업무였을까. 미니멀한 인사짬으로 볼 때 주기가 짧은 사람들은 슬픈루팡일 가능성이 크다. 뭔가 하고는 싶은데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괜찮은 상사라면 몇 번의 기회는 줄 것이다. 인수인계를 잘해줄 능력 있는 선임을 붙여 준다던지, 성실만 하다면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업무를 배정한다던지 하는 상사로써의 노력.

그럼에도 업무 리스가 반복되면 점차 그의 메일함엔 참조 문서만 가득해지고, 자기애가 강한 슬픈루팡은 누군가의 탓을 하기 시작한다. 아, 이 회사가 나를 알아주지 않는구나. 나에게 업무를 주지 않고 텃세를 부리는구나. 삐딱선을 제대로 타고 다시 이직 준비를 한다. 인사를 하는 입장에서 가장 꺼려하는 타입 중 하나다. 사람 하나 들이는데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그 작업을 다 해놓고 나니 금방 또 간단다. 다시 그 자의 퇴직을 위해 해야 할 작업이 수가지다. 머릿속에 몇 명의 슬픈루팡이 스쳐 지나간다. 메뚜기도 한 철 뛰면 지친다는데, 쉴 새 없이 옮겨 다니는 그들은 안녕하시려나.


근속기간이 긴 직원의 퇴사는 퇴역군인 떠나보내듯 마음이 숙연해진다. 회사에서 무리하게 사업 확장을 한다거나, 루팡이 존재할 틈 없이 인력 충원을 안 해주는 경우. 참다못해 뛰쳐나오는 케이스가 많다. 그런 케이스들은 동종업계 이직자도 있지만, 귀농을 한다던지 사시미를 들고 회를 친다던지 전혀 다른 길로 가기도 한다. 현재 재직 중인 회사는 유난히 재입사가 많다. 입사와 퇴사 처리의 반복이지만, 그 업무가 그리 억울하지 않은 건 열에 아홉 장기근속하셨던 분들이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휴직계도 열려 있지만 완전한 퇴직을 맛보고 싶으셨던 것 같다.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그래! 갔다가 다시 오너라! 하시는 연어들의 고향 같은 대표님은 나의 라지 피스 오브 장기근속 비결이다. 건강하세요 사장님 하트.


월급 루팡은 딱 대리 중간까지. 더 나아가면 빌런이 등장한다. 측은지심을 업무능력보다 크게 쳐주는 회사에 정착해서 직위를 받은 운 좋은 슬픈루팡들은 빌런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높다. 근속연수가 가져다준 자리에서 말도 안 되는 급여 수준을 영위하며 호모 에렉투스 불 피우듯 윗사람에게 손바닥만 신나게 비비다가 뜻대로 불이 붙지 않으면 부하 직원들 속에 천불을 짚힌다. 월급 도둑을 넘어선 악당이다. 만화 속에 등장하는 정의의 사도는 없다. 이 한 몸 불 싸지르고 망할 빌런의 만행을 고하겠노라 사직서와 함께 신문고를 올린 직원이 있었다. 결과가 어땠을까. 사직서 낸 직원만 병신이 되었다. 그동안의 업무 성과가 좋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였고, 상사의 명령에도 늘 불만이 많았던 직원으로 그를 매도했다. 결국 빌런에게 작은 대미지 조차 입히지 못한 퇴사자 A 씨는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혀 기억 속에 사라졌다. 전 직원이 컴퓨터 전원을 끄고 빌런을 처단하자며 봉기하지 않는 이상, 그저 이 악 물고 자본주의 미소를 장착하는 것 밖에 방법이 없는 건가. 오늘도 어금니가 단단해져 간다.


속에 난 천불 제압 중


슬픈루팡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탓하지 말고 달라져야 한다. 팩트를 숨기고 남 탓만 하고 앉아있으면 나 역시 누군가의 빌런이 될지도 모른다. 소 되새김질하듯 동료를 씹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스스로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할 수 있다면 업무도 달라지고 그에 따른 포지션이 온다.


숱한 빌런들을 바로 위 상사로 겪었고, 결국 그들의 사직서도 내 손으로 처리하며 꿋꿋하게 이 자리에 살아있는 나는 간헐적 루팡이다. 해야 할 일은 다 한다. 농경시대 소처럼 필사적으로 일하지는 않는다. 길게는 못 쉬어도 때 되면 쉰다. 혼날 땐 쿨하게 혼난다. 이도 저도 아닌 게 너무 미적지근한 거 아니냐 할 수 있다. 몸에는 미지근한 물이 최고고 사회생활은 적당히가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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