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둘의 인맥
잘 웃고 크게 고집이 없다. 나는 누군가의 보험일지도 모른다. 그게 어찌나 분하고 못마땅하던지, 딱 꼬집어 말한 것도 아닌데 그저 감으로 Full가드를 올리고 점차 멀어졌다. 사실 그 감은 썩 잘 맞아떨어졌다. 통찰력이 있다고 자만하는 편이다. 관계에 흠씬 후 두러 맞았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나에게 자만을 처방했다. 첫 만남부터 이 사람은 나를 인맥으로 보지 않을 캐주얼한 관계이며, 그렇기에 뭔가 부탁을 한다면 가볍게 거절을 해도 되고 어렵지 않은 거라면 들어주고 말자. 웃는 얼굴 너머로 내가 너의 머리 위에 있다는 자만의 장벽을 친다. 거리두기다. 요즘 이슈라 한 번 더 깨닫게 되었지만, 거리를 두면 아플 일이 확률적으로 줄어든다.
한국인이 못 읽는 한글이 있다. ‘미시오’와 ‘당기시오’ 다. 나는 의심할 것도 없는 한국인인지 밀고 당기기를 못한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사람만 보면 좋다고 배를 드러내고 눕는 시고르자브종 같았다. 불행하게도 경험으로 학습하는 편이고, 밀고 당기고 재고 따지는 건 경험한 적 없었다. 좋다는 걸 상대방이 알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 꼬리를 흔들고 꺙꺙 짖었다. 앞 뒤 패 다 까고 모든 관계를 힘겹게 끌고 가던 스무 살은 제풀에 지쳐 쓰러졌다. 한 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관계의 코마 상태였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자 어느 영화의 각성한 전사 같았다. 걱정이 없어서 걱정이 없으면 걱정이 없겠네 하는 말장난처럼, 관계도 좋은 게 좋은 거면 좋을 텐데.
나는 어딘가 개 같은 구석이 있다. 개는 직감적으로 내가 니 곁에 있어줘야겠구나 하는 걸 느낀다고 한다. 개가 해야 옳지 잘했다 하며 껌이라도 얻어먹지, 사람이 그러면 가소로운 오지랖이 된다. 외면하는 게 편한 걸 알지만 굳이 오지랖을 펼친다. 불편함을 감수한 호의를 베풀고 인정받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던진 오지랖에 불편했을 개구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반면에 놓치지 말아야 할 순간을 귀찮아서, 혹은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하며 안일하게 방치하고 후회하는 경우도 있다. 익숙해질 때쯤 실수를 한다. '그땐 어려서 잘 몰랐으니까' 같은 핑계로 애써 잊으려 해 보지만 진한 후회로 평생 남을 아쉬운 순간들이 있다. 난 그들을 어떻게 생각한 걸까. 어떻게 해도 늘 내 곁에 있어줄, 처음과 다른 의미의 ‘보험 같은 존재’로 생각했던 건 아닐까.
기꺼이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꺼내본 하루가 있다. 소수정예 같은 친구지만, 그들은 참 나에게 기꺼이 한다. 잊지 말아야 하는데, 내가 별로인 사람인지 받은 덩어리는 생각하지 못하고 작은 조각에 서운해할 때가 있다. 순간의 서운한 감정과 지난날의 감사했던 감정을 상계시키는 건 어나더 레벨이다. 좀 더 성숙한 레벨이 되면 가능해질까. 힘껏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던 손잡이가 나이가 드니 자연스럽게 잡히는 것처럼. 몸이 자라듯 마음도 자라면 좋겠다.
나이가 드니 애쓰는 것을 위한 에너지가 스파크 경사 올라가듯 빨리 고갈된다. 하고 싶은 걸 할 때 느끼는 만족보다, 하기 싫은 걸 하지 않을 때의 편안함이 좋다. 서른 까지만 해도 내 결혼식에 하객이 몇이나 올까 하는 생각으로 현재의 인맥을 정의했다. 열 손가락이 부족하지 않았다. 어딘지 씁쓸한 기분에 코를 훔쳤지만, 할지 안 할지도 모를 결혼식에 올 하객을 세아리며 지난날의 행적을 한탄하는 건 재작년쯤 졸업했다. 왓에버 아이 돈 케어다.
호구 같아 보이긴 해도 누군가가 나를 보험으로 생각한다는 건 썩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메인의 부재일 때 차선으로 선택되는 존재일지 몰라도, 공은 내 손에 있다. 비갱신형 보험이라 100세까지 보장받을 줄 알았는데, 눈 밑에 점찍고 나타나 '사실 갱신형이었어'해도 된다.
착한 사람과 착한 사람이 만나면 착한 사람이 둘이어야 하는데, 착한 마음에 중량이 있는 게 아니어서 결국 조금 덜 착한 사람이 생긴다. 결과적으로 더 착한 사람에게 덜 착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고, 착하지 않으면 죽을병에 걸린 나도 누군가에게 나는 썅x이 되는 논리. 어차피 누군가에게는 악인이니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