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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사 Oct 14. 2020

좋아요 누르기가 힘든 시기.

속는 셈 치자.


“남들은 다 행복한데 나만 불행한 거 같아서, 그게 심통이 나서 인생이 힘든 거다”


잭 니콜슨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대사. 대표적 명대사는 따로 있지만, 저 대사가 와인 두 잔에 취해 몽롱하던 내 손에 메모장을 들게 했다. 명쾌했다. 저 한마디만으로도 잘 만든 영화다 싶다.


남과 비교하기 전의 나는 썩 괜찮다. 뭐가 별로인지, 좋은 건지도 모른다. 비교대상이 있어야 길고 짧음을 안다. 굳이 비교했다가 내 것이 후져 보이면 그때부터 좋아요 누르기가 힘들어진다. 남들은 다 가지고 있는데 나만 없는 것 같다. 별 대수롭지 않으면 괜찮은데, 마음이든 통장이든 여유가 없으면 내 신세가 한탄스럽게 느껴진다.


나에게도 좋아요 누르기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는 마치 알레르기성 비염 같아서 완전히 물러가지는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서 눌러앉았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진다. 증상도 비슷하다. 무기력하고, 답답하고, 몸에 두른 것 다 벗어던지고 혼자 있고 싶다. 말은 하면 할수록 답답하고 숨쉬기도 힘들다. 왼 손으로 비비고 오른손으로 비벼도 세상만사 눈꼴시다.


스무 살 때. 멀리 대학을 와서 친구도, 인척도 없었던 그 무렵. 지금에야 죽고 못 사는 친구가 된 그녀들이 있지만, 그땐 왠지 모르게 센치했다. 뒤늦게 사춘기가 온 건지, 늘 혼자라고 생각했다. 주변에 사람은 많은데 외로웠다. 고독 중에 고독은 군중 속에 고독이고, 빈곤 중의 빈곤은 풍요 속의 빈곤이라 했던가. 그때의 나는 시기와 질투, 자괴감이 덩어리 져 자존감을 그림자처럼 밟고 다녔다. 누구의 기쁨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 못했고, 같이 슬퍼해 주지 못했다. 내가 제일 안쓰럽고 힘든 사람인데, 누굴 축하해 줘? 슬퍼봤자 나보다 더 힘들겠어? 하는 꼬인 마음은 나를 동굴로 인도했다. 그 동굴은 빛 하나 없이 깜깜해서 그림자 같던 자존감 그 마저도 땅 밑으로 꺼진 듯 자취를 감췄다. 스스로 만든 감옥이었다.


남들은 다 행복한 것 같은데, 나만 애쓰면서 사는 것 같고 심지어 그럼에도 나만 불행한 것 같아서 그게 심통이 났던 거다. 지금도 부러움을 인정하는 건 쉽지 않다. 특히 내 상황이 힘들어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땐 좋아요 버튼의 무게가 젖은 솜뭉치 같다. 나는 꽤 오랫동안 내가 만든 감옥에 갇혀 있었고, 아마 스물일곱 넘어서 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진 것 같다. 딱히 뭘 했다기 보단,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것. 쟤는 왜 저럴까 하고 꼬아보지 말고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미련을 내려놓으니 질투가 사라지고, 그럴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꼬아보지 않게 되었다. 그 두 가지를 품었더니 마음의 감옥에서 출소를 허락했다.


가장 쉽게 남과 나를 비교할 수 있는 도구인 SNS는 '속는 셈'의 약자라 생각하고, 그 안의 사람과 나를 진지하게 비교하며 심통 내지 말자. 설마 니가? 하며 꼬아 보지도 말고, '너는 그렇구나.' 속는 셈 쳤다 하고 좋아요를 눌러주자. '부러우면 진다'라는 한낱 입버릇에 현혹되지 말자. 나 이렇게 잘 살고 있어, 난 이렇게 비싼 곳도 올 수 있고, 이런 비싼 가방쯤은 분기별로 사줘야지. 내 남편 혹은 남자 친구는 더없이 자상하고, 너무 행복한 나를 좀 봐봐 이 친구 녀석들아. 한다면, 그냥 '그렇구나' 하면 된다. 신중하지 않아도 된다. 마치 회사 단톡 방 부장님 개그에 'ㅋㅋㅋ'를 무표정하게 난사할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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