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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사 Oct 08. 2020

치고 빠지는 스타일.

호의는 무조건 옳은가.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무려 EBS 한국 특선영화로도 방영된 부당거래 속 주양(류승범)의 명대사다. 저렇게 한 문장으로 시원하게 뱉어주니 확실하게 와 닿는다. 너의 편의를 봐주고자 했던, 심지어 나의 불편을 감수하며 베풀던 값진 호의를 어느새 권리인 듯 당연히 여기는 경우 없는 경우가 생긴다. 그런 순간이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고 네이버에 가까운 킥복싱 체육관을 검색해 본다. 돌려차기로 인중을 걷어 차고 싶다. 엘보우로 정수리를 찍고 싶다. 분노조절장애가 괜히 생기는 게 아니다. 애매하게 착한 자가 분노조절장애 씨앗의 최애 숙주다. 불합리하면 바로 싸지르는 사람들은 시스템 자체가 쌓일 틈 없이 배출하는 스타일이라 조절하고 말 것도 없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호의를 베푼 것도 나고, 그걸 권리로 느끼게 만든 것도 나다. 뭘 위해서였지.


데자뷔처럼 반복되는 상황에 마셔 없앤 소주만 한 평 남짓 연못이고, 한숨으로 꺼진 땅은 내핵과 맞닿았다. 내 탓인 것 같다. 말 그대로 친절한 마음인 호의인데, 베풀면서 내심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피드백을 원했던 거다. 칭찬에 춤추는 고래가 배가 많이 고팠던 모양인지, 뭔가 칭찬받을 만한 행동을 하고 피드백을 원했던 것 같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사람들이 고마워했으면 좋겠으니까. 나를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으니까. 평판이 좋아지면 좋겠어서. 결국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써서 스스로가 짊어진 짐이다. 신경 쓰면 쓸수록, 그런 사람이 되면 될수록 짐은 무거워지고, 마음은 힘들어지고, 말도 안 되는 작은 타이밍에 분노조절의 기능을 상실한다. 비극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일회성인 호의, 예를 들면 뛰어오는 자를 위해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눌러 준다던지, 떨어진 지갑을 주워준다던지, 아이가 있는 가족에게 넓은 자리를 양보한다던지 하는 가볍고 일회적인 호의는 피드백을 생각할 것도 없이 기꺼이가 된다. '반복되는 호의'가 탈이 난다. 반복이라는 건 꾸준하다는 것. 부처 혹은 엄마 아닌 이상 사심 없이 이타적으로 꾸준히 호의를 베풀기는 어려워 보인다. 결국 나를 위해 베풀었던 호의가 아니었는지 의심해 봐야 한다. 호의가 계속되려면 주기적으로 만나는 대상이 있을 것이고, 반복되는 어떤 행동이 일어나는 장소일 것이며, 정해진 포지션이 있는 조직일 가능성이 크다. 늘어놓고 보니 회사의 특성이다. 회사에서의 평판, 포지션 따위의 것들 때문에 베푼 호의는 아니었는지 돌이켜본다.


그럼에도 호의가 권리가 된 듯 당연히 여겨질 때 의욕이 상실되고, 허탈하고, 무의미 해지고, 베푼 호의에 감사하지 않은 사람들이 싫어진다. 누가 시키지도 않은 걸 나 좋자고 해놓고선,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제 풀에 지쳐서 사람들을 미워한다. 여기에 보상심리까지 더해지면 조커가 된다.


"늘 이렇게 베풀었는데, 내가 요구하는 이거 하나 안 해줘?"


영화 '조커'


나는 아침에 우유를 마시지 못한다. 유당불내증으로 빈속에 우유를 마시면 화장실에서 미라가 돼어 나온다. 어느 날부터 영업팀 대리님이 아침마다 굿모닝 이라며 우유를 사다 주신다. 그게 호의였을지 몰라도 나에겐 부담이었다. 나중엔 안 되겠다 싶어 말씀드렸는데, 어차피 사는 김에 사는 거라며 뒀다 마시라고 했다. 한 달쯤 지났나. 연차로 쉬고 있는 내게 회사에 출근할 것을 요구했다. 내일 처리해도 될 일이었는데, 본인 연차 걱정에 미리 끝내고 싶으셨던 거다. 출근을 할까 싶었지만, 대자연과 비염이 무기력하게 만들었다는 핑계로 출근 요구를 거절했다.


"생각해서 챙겨 주는데 너무 본인만 아네."   


거절하자 망설임 없이 돌아온 말이었다. 저 한마디는 내 하루를 완전히 망쳐놨다. 난 원하지 않았던 호의였다. 의사 전달도 확실히 했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하고 싶어 던진 호의에 왜 지나가던 개구리가 맞아 죽어야 하는가. 그 날 이후 우유 대리님은 나에게 우유를 주지 않았다.


대가를 바라는 호의는 구두 밑창에 깔아 넣고 출근하자. 호의는 적당히 치고 빠지는 스타일로 하자. 줄 때는 적당히 치고, 받는 호의엔 적당히 빠지는.


제대로 치고 빠질 수만 있다면 킥복싱 체육관은 더 이상 검색하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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