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빙수가 최고인 줄 알았다.
중학생 때까지 이장님이 최고 권력이던 마을에서 살았다. 고등학생이 되자 버스를 타야 학교에 갈 수 있었고, 교가에 등장하는 남산의 전기는 굽이쳐 흘러가는 남한강 줄기로 진화했다. 만남의 장소가 회관에서 시내로 바뀌는 시기 었다. 라코스테보다 크로커다일이 대세이며, Chanel(샤넬)을 채널로 읽던 편견 없던 동네에 아이스크림 맛이 서른한 가지나 되는 체인점이 생기고, 지금에서 나야 명품 이름인 줄 알게 된 까르띠에라는 돈가스 전문점은 멋짐을 뽐낼 수 있던 학생들의 공공연한 아지트였는데, 곧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전 좌석이 그네로 된 커피숍이 생겼다는 입소문은 SNS 없던 그 시절에도 줄 서서 먹게 할 만큼 대단했다. 그러다 보니 하교 시간만 되면 각양각색의 교복과 노스페이스 바람막이들이 둘러앉아 산처럼 쌓인 빙수를 퍼먹는 진풍경이 이어졌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광역시 소재의 대학교에 입학했다. 혼자 시외버스를 타는 것도 처음이었다. 뚱뚱한 배터리의 2G 폴더폰을 손에 쥐고 작은 액정에 뜬 문자를 확인하며 교실 아닌 강의실로 등교했던 첫날. 입학 전 2박 3일로 갔던 신입생 OT는 9시 뉴스에 나올법한 충격이었는데, 관광버스 하차부터 승차까지 마시고 마시고 마신 기억밖에 없어서 72 Point 궁서체로 알콜지옥 네 글자 쓰면 2박 3일이 함축된다.
입학 한 달 후쯤인가. 아는 건 서로의 이름뿐인 친구들과 광역시의 상징적인 동네로 마실을 갔다. 비슷하게 생긴 버스가 숫자만 바꿔달고 바쁘게도 움직였다. 그 커다란 번화가에는 이 동네 사람들 신발을 모조리 책임지겠노라 다짐한 듯 운동화 매장이 즐비했다. 내가 살던 곳엔 공룡발이라는 터줏대감 신발가게, 돈이 좀 있으면 프로스펙스가 최고였는데.
곧 멈춰 선 친구들은 커다란 천사가 화살을 쏘고 있는 간판을 가리켰다. 오락실인가. 우리 안에 천사가 있다는데. 뭐냐 묻기도 뭐한 사이여서 그냥 따라 들어갔다. 세상에, 커피숍이었다. 사실 우리 동네에서는 파르페나 빙수를 먹으러 커피숍에 갔다. 커피는 레쓰비 아니면 맥심이다. 저 까만색 음료를 돈 주고 사 먹게 되다니. 아이스크림은 없냐 물으니 무슨 카도.. 무슨 카도가 있다 했다. 지금은 커피를 사발로 마시고도 모자라지만, 그땐 나름 어린이라 프림 안 들어간 커피는 영 이상했나 보다. 놀라운 건 이뿐만이 아니었다. 커피마다 죄다 영어로 된 사이즈가 있더라. 종류는 뭐 이리 많은지, 천장 메뉴판에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쓰여있는데 그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난독증인 사람은 커피도 못 마시겠다 싶었다. 다방커피, 블랙커피 둘 중 하나면 되지 않나. 몇 입이면 사라질 음료 하나의 가격이 레쓰비 한 박스와 맞먹었다. 어버버하고 있자니 한 친구가 뭔가 주문하고 계산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 생에 첫 아메리카노였다.
맛은 잘 기억 안 나지만 아마 반 이상 남기고 나왔다. 삼십하고도 두 살 더 산 지금은 혈관에 피 대신 아메리카노가 흐르고 있지 않을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하고 있다.
가장 만만하게 가는 스타벅스도 처음 방문했을 땐 사이즈가 난관이었다. 연습하고 간 건 미듐 라지인데, 그란데가 뭐고 벤티가 왜 거기서 나와. 그냥 제일 작은 거 달라고 했다. 너무 작더라. 아마 short이었나 보다. 종이컵 같은 걸 받아 들고 물어보지도 못했던 스물 셋 된 아이는 머리를 긁적이며 아껴먹을 것도 없이 적은 양의 커피를 슥 마시고 도망치듯 나왔고, 그 이후 2년 동안 스타벅스 문을 잡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넓적한 접시에 수북이 올려주던 눈꽃빙수가 단연 최고였던 것 같다. 공짜로 리필되는 토스트에 생크림까지. 돈이 어디서 났는지 한 접시 오천 원 하는 걸 1인 1개씩 시켜 먹었다. 카페 규정상 그래야 되는 것도 아니었는데, 많이 먹고 싶어서였는지 아님 여럿이 가서 한 개만 시켜놓고 앉아 있는 게 미안해서였는지 기억 나지 않지만 "빙수 하나 주세요" 이 말 하나면 환상적인 맛의 눈꽃빙수가 내 차지였다.
뉴딜정책 시대에 댐 건설 노동자들은 점심시간 끝날 무렵 늘 커피를 제공받았단다. 세상에 공짜는 없고, 사용자들은 그때도 머리가 비상했으며, 커피는 피곤한 뇌를 망각시키는 합법적인 마약이다. 오늘 하루는 검은 속내의 커피를 내려놓고, 하얀 빙수 한 그릇 할까 한다. 인절미 빙수가 먹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