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한 시기는 누가 정한 거야.
작년 4월 마지막 미혼 친구가 기혼자가 되었다. 고향 친구들은 서른이 되기 전에 앞다퉈 기혼자가 되었고,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부케를 받아야 했다. 마지막은 되지 않으리라 했건만, 자의인지 타의인지 고의인지 실수인지. 마지막이 되었다. 그녀들은 소위 ‘적당한 시기’에 결혼을 했고, 많게는 셋, 작게는 3개월 된 2세도 있다. 나만 없다. 남편도, 시댁도, 2세도. 미니멀 라이프가 이런 건가 싶게 호적마저 참 미니멀하다.
모든 건 때가 있다고 한다. 이게 눈에 보이질 않아서 바로 앞에 있는지, 이미 뒤로 넘어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냥 있다니까 그런 줄 안다. 누가 정해놓은 줄도 모르는 '그때’가 지나가면 '늦어졌다'며 걱정을 한다.
'퇴근할 때'는 근로계약서 상에 명시되어 있다. 사용자도 알고 근로자도 알지만 그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려니 한다. 퇴근할 때를 놓치는 게 더 큰 일 아닌가. 조금씩 밀린 ‘그때’들을 1년으로 모아 환산하면 1년은 365일 이상이 될 텐데. 연봉은 딱 1년 치만 주지 않는가?
30대로 산지 2년쯤 되니 남자 친구 있냐는 질문이 결혼은 했냐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왜 안했냐고 묻는다. 서른 하나 까지는 변호하듯 정성껏 대답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그냥요” 하고 만다. 여자는 남자와 달라서 서둘러야 한다고, 더 늦으면 노산이라나. 아저씨 애 낳아드릴 거 아니니 신경 끄세요. 하고 싶지만, 사회생활 미소 한 발 날리는 걸로 끝낸다. 딸 같아서 한다는 그 걱정은 부디 제 친부께 양보하세요.
결혼에 대해 생각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뿐. 누가 정했는지도 모를 ‘적당한 시기’로 초조하고 싶지 않다. 나는 분명 나만의 시계가 있다. 내 시간에 맞춰 가면 그뿐이다.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건 내 시간을 살기로 한 나 자신이 스스로 해쳐나가야 할 일. 그래, 솔직히 말하면 노년에 애도 남편도 없이 외로워서 어쩌지. 걱정된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가족여행에, 자식 자랑에 바쁠 때 나는 너무 덩그런 하면 어쩌나, 괜찮지 않지만 괜찮은 척 연기해야 할 상황이 오면 어쩌나. 겁난다. 암묵적으로 규정된 그 ‘적당한 시기’의 압박에 불안하다. 편히 쉴 수가 없다. 이 불안감의 진통제는 노동이다. 공휴일 낀 주말이 3일 이상 되면 출근이 하고 싶다. 좀 쉬고 싶은데 쉬고 싶지 않다. 회사에서 필요 없는 존재가 되면 어쩌나. 심심할 틈 없이 병을 만드는 스타일이다.
나의 시간을 살겠다 고집부릴 것 없이 ‘적당한 때’에 결혼을 하면 적어도 지금보다 걱정이 없을까.
한 번쯤 보고 싶은 게 있다. 재력이다. 사회생활 이후 만난 남자 친구들은 재력보단 잠재력 있는 스타일이었는지 나보다 급여가 적었다. 동갑이라 사회생활을 덜 해서였겠지만, 어쨌든 신데렐라 팔자는 아니다. 혼인신고는 못해도 근로계약은 평생 해야 한다. 라떼를 좋아하는 어르신들이 간혹 남편한테 빌어먹고 살아야 할 것처럼 말한다. 결혼은 남자가 여자를 위해 하는 근로계약이 아니다. 굳이 계약으로 표현하자면 양방향 평등 계약이다. 결혼해서 편히 살 거라는 달달한 꿈은 꿔본 적도 없다.
때에 맞추면 보증서를 써주는것도 아니다. Best라는 보장은 없다. 암묵적으로 규정해 놓은 '적당한 때'를 지나가는 게 Worst라 할 근거도 없다.
그 중간 정도의 삶은 어떨까. Worst와 Best 사이 어딘가에 있는 better처럼. Better가 애매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Best일 보장이 없다면 Better 인 편도 괜찮지 않을까.
하루는 여전히 24시간이고, 1년은 365일임에 변함이 없지만 그 ‘적당한 시기’라는 것은 분명 지각 변동하듯 움직이고 있다. 변화하는 인식에 얼리버드가 되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