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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이사 Oct 23. 2020

홧병이라는 진단에 처방은 퇴사.

제가 주치의입니다.


"원인은 스트레스예요. 내복약으로는 힘들 것 같고. 아, 퇴사가 좋겠네요. 퇴사하고 2주 뒤에도 안 좋으면 다시 오세요."


실비가 무색하게 병원에 가지 않는다. 병원 갈 돈으로 고기 사 먹는다. 스무 살 때 다리를 크게 접질려 삼선 슬리퍼 신고 학교 다니던 시절, 못 참고 한의원에 갔다. 일주일 만에 나았다. 병원에 가면 일주일, 안 가면 칠일 만에 낫는다는 얘기가 있다. 내 몸이 딱 그렇다. 굳이 안 간다. 어차피 듣는 얘기는 스트레스와 잘못된 식습관이다. 잔고가 마르지 않는 통장이 생기지 않는 한 계속될 스트레스고, 100세 누리고자 당장 먹을 밀가루를 끊을 순 없다. 다들 챙겨 맞는다는 독감백신 한 번 맞아본 적 없다. 그냥 이렇게도 살아진다. 담쌓고 지내니 의사 선생님 앞에 앉으면 낯을 가린다. 서먹하다. 어디가 안 좋으냐 묻는데, 어디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면접 보는 초년생처럼 입이 안 떨어진다. 작년 9월. 전에 없던 현기증으로 내과에 갔다. 2019년 첫 내원이었다. 간 김에 증상을 빠짐없이 말하고 싶은데 벙어리가 될 것이 뻔하기에 카톡에 증상을 쭉 적어 의사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서른 한 살의 병원 가기 전 준비물


피식 웃으셨다. 아이고.. 많이 힘드신가 봐요. 무려 ‘홧병’ 이었다. 이런저런 조언을 주셨다. 종합해 보면 그는 나에게 퇴사를 처방했다. 2019년 9월 20일 이후 병원에 가지 않았다. 연말 정산할 때도 의료비는 산삼으로 깍두기 담가먹는 사람처럼 휑하다. 일 안 하고 편하게 살면 낫는다는 속 편한 얘기 듣자고 돈과 시간을 투자해 환자 대열에 앉아있고 싶지 않다. 지르텍 말고 처방약을 먹어야 편하다는 비염 선배님들의 말에 병원에 가볼까 했지만, 마스크 써야 하는 건 변함없으니 내년 봄으로 미뤘다.


혹시 미취학 아동들과 일하는 걸까. 다 큰 어른들이 도대체 나에게 왜 그러는 걸까 싶은 날이 있다. 대자연의 감정 기복을 핑계 삼고 싶지는 않지만 복합적으로 겹치는 날엔 입술에 피가 날 것 같다. 화를 넘어서 분노의 경지가 오면 오히려 입을 닫는다. 그냥 닫기에는 화가 안 가시니 입술을 슬쩍 깨문다. 울화가 치밀 때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목구멍이 뜨거워진다. 1+1=2 인 건 알겠는데, 왜 일 더하기 일이 이 냐고 묻는다. 테니스 증후군을 앓고 있는 팔꿈치로 테니스 공 내려치듯 양 쪽 뺨을 후려치고 싶다. 쌓이고 쌓이다 한 번 독하게 싸지르고 나면 마음이 안 좋다. 하아, 그냥 한 번 참을걸 한다. 이게 반복되니 화가 나도 입을 다무는 버릇이 생겼다. 참고 지나가면 될 일을 괜히 맞섰다가 울화에 찜찜함까지 추가해야 한다. 별로 추가하고 싶은 옵션은 아니니 그냥 정량만큼만 속 터지고 만다.


미국 드라마 '섹스 엔 더 시티(sex and the city)' 극 중 캐리 브래드쇼는 결혼을 약속한 연인에 포스트잇으로 이별을 통보받는다. 어제 까지 달콤했는데, 하루아침에 날 미워하지 말라는 포스트잇 한 장 냉장고에 붙여놓고 홀연히 사라진 약혼남. 감정이입은 어렵지만 그 분노는 말도 못 할 거라 짐작해 본다. 입사 1년 좀 지났을 때, 나 역시 포스트잇으로 치를 떤 적이 있다. 인사 총무에 온갖 허드렛일 다 하던 시절. 창립기념행사까지 겹쳐 팔자에 있는 야근이란 야근은 싹싹 긁어했음에도 대표이사님까지 올라가야 할 결재문서가 늦어진 적이 있다. 다음날 팀장님께서는 전결 서류를 내게 주셨고, 미쳐 제거하지 못하신 건지 아님 옛다 이거나 먹어라 하고 남겨놓으신 건지 노란색 포스트잇이 그 사이 어딘가 팔랑였다. "일이사의 업무 미숙으로 결재가 늦어졌습니다." 빌어먹을? 같이 업무를 분담할 직원도 없었고, 후임도 없었고, 선임은 다른 일로 늘 바빴다. 메인 업무에 추가로 붙는 잡무들에 화장실도 못 가고 방광을 괴롭히며 일하는 내게 격려는 못할 망정, 본인 살고자 나를 방패막이로 썼다. 분노와 허탈, 배신감이 한대 뭉쳐 잽싸게 뒤통수를 쌔리고 갔다. 가운데 손가락은 이럴 때 쓰라고 있나 보다 싶었다. 어쨌든 그분의 사직서도 내 손으로 받았다.


현대인 질병의 근원이 스트레스라면, 그 스트레스에 술이든 휴가든 처방하는 건 본인이다. 의대는 안 나왔지만 모두가 스스로의 주치의다. 스트레스를 건강하게 풀 수 있는 닥터가 되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레지던트 과정처럼 시행착오를 겪기도 한다. 그 과정들은 스트레스의 명의로 만든다. 나는 스트레스를 술과 여행으로 푸는 편인데 어느 날 침묵의 장기가 말을 걸었다. 애야, 더 마시면 센강 보기 전에 요단강을 건너는 수가 있어. 여러 브랜드의 밀크씨슬도 세월에 축적된 참이슬을 밀어내기엔 역부족인 듯하다. 술을 줄이니 여행이라도 해야 하는데 역병이 돌아 어렵게 한다. 이 시기에 끌리듯 쓰게 된 글이 요즘 나에게 처방된 스트레스 치료제다. 내일 아침 찬바람에 오픈하자마자 뛰쳐 들어간 스타벅스에서 따뜻한 베이글과 시꺼먼 커피 한 잔 하며 타자기 두드릴 생각에 벌써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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