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가장 사랑스러운 날일지 모르니까
사실 언니랑 내 사이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몸에 남은 흉터라든지, 심하게 맞던 날의 억울함, 언니 옷을 입고 나갔다가 저 멀리 언니를 발견하고 빛의 속도로 도망가던 긴박함 같은 기억이 가장 날카롭게 강렬하니까. 세상 많은 동생들이 그렇듯 그저 ‘숨 쉬는 장난감’ 역할로서 마구잡이 괴롭힘을 당하던 시절을 지나, 그냥 언니 친구인 언니오빠들이 잘해줘서 안온하게 지내던 날들 같은 조각조각이 사사삭 가볍게 스쳐간다. 어떤 날은 원수였고 어떤 날은 남보다 관심 없는 사이일 때도 있었다. 어떤 계기로 우리는 꽤나 돈독해졌고, 언젠가부터는 언니를 선물해 준 엄빠에게 자주 감사하는 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서로만을 유일한 삶의 동반자로 여기는 듯, 몸과 마음 모두 밀착된 일상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런 언니에게서 힘든 얼굴을 발견하게 된 것은 꽤나 오래된 일이다. 무기 없이 바람을 맞는 파도 같았다. 태풍이 일다가 잠잠해지는가 하면 머지않아 더 힘센 폭풍을 맞게 되는 사이클을 뱅뱅 돌았다. 답을 알면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애잔하고 불안했다. 웰니스wellness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사람으로서 실질적인 도움을 줄 방법을 고민하는 날이 많았다. 내 길의 뜻이 더 분명해지기도, 철저한 무력감에 괴로운 날들도 언니 일상의 파도와 함께 울렁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매일 아침 출근하는 언니를 배웅하며 현관에서 사진으로 남겼다. 이런 날들마저 남기고 싶은 마음과, 힘찬 하루를 응원하고 싶은 사랑의 마음으로 가장 크게 웃고 손을 흔들었다. 내 사랑을 안고 무거운 발걸음에 행복이 깃들길, 자신의 웃는 얼굴을 잊어버리지 않길, 왜 괴로운 일상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나야 하는지 알아차리길,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위한 선택에 용기를 갖기를 바랐다.
이번 여행에서도 나에게 가장 중대한 일은 그것이었다. 오랜만에 긴 방학을 맞이한 언니가 회복할 계기를 만들도록 돕는 것. 어렵게 만든 자유의 시작을 나와 함께 하겠다는 선택에 고마운 마음도 있었다. 그저 어떻게든 좋은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언니의 모습을 많이 남기고 싶다. 그것이 저 사람이 ‘힘듦’을 벗어나,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기록이 된다면 참으로 값지겠다.
지금이 언니를 가장 사랑하는 순간일지 모르니까, 또 언제 미워하게 될지 모르니까.
이 마음 이대로 실컷 유난을 좀 떨어봐도 괜찮지 않나?
오늘만큼은 나보다 더 아껴주고 싶은 마음, 그 애틋한 마음에 충실하고 싶었다. 언제 어떻게 기억될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마음을 다해 무엇이든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모든 장면이 소중한 이 여행이 그렇게 시작됐다. 언니는 오래간만에 어딘가 들뜨고 홀가분한 얼굴이었다.
/
Berawa 짱구 브라와
좋아하던 곳이지만 어찌 또 처음인 듯 기억이 가물한 와중에 몇 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곳들이 속속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소개해줄 이야깃거리들이 솔솔 피어오른다. 늦은 밤 도착이라 공항에서 멀지 않은 짱구 Canggu 아래쯤(새벽 시간 택시로 20분 정도 소요)에 숙소를 잡고 첫 며칠을 머물기로. 짱구 메인에는 딱히 숙소가 마땅치 않아서 쇼트커트(canggu shortcut) 너머로 쉽게 메인 거리에 도달할 만한 브라와에 며칠 머물며 간을 보기 좋다. 딱 깔끔한 방에 코앞에 맛있는 커피집, 음식점, 편의점 등등 모든 게 딱 적당히 마음에 들었다. 적당히 안온하고, 적당히 새로운 환경에서 오로지 우리의 마음에 집중할 수 있는 시작.
/
고젝과 박미, 얼떨결에 본 첫 번째 선라이즈
비행기가 연착되어 예상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막상 도착을 하고 나니 피곤함을 뛰어넘칠듯이 신이 치솟았다. 까만 달밤에 고젝 gojek(발리의 배민) 어플을 열고야 말았다. 파티로 시작되는 여행. 발리는 우리나라처럼 배달음식 시스템이 잘 되어있어 이렇게 요긴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네. 대충 짐을 풀고 씻고 나와 언니가 그리던 박미Bakmi(완자와 쫄깃한 계란면이 담긴 인도네시아 국물 요리)를 먹는데, 스르르륵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보라색 하늘. 발리에서 만난 첫 번째 아침이었다. 자면서도 웃던 꿀같은 첫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