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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노 Oct 22. 2023

05   Lembongan : 섬에서 건진 용기

나 이 장면 만나러 발리에 왔나 봐

같은 풍경에 영원히 감동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ㅡ  다시 일상처럼 익숙해진 풍경에 감흥을 잃고 만 참이었다. 하루 몇 백장에서 몇 장으로 순식간에 줄어든 아이폰 사진첩 숫자가 대변하듯, 더는 감동받지 못하는 이 마음을 원망하던 참이었다.  옴마, 섬으로 들어오니 또 새로운 광경이 있다. 공허하던 마음이 그새 가뿐히 다시 채워지니 참 속절없기도 하여라... 발리는 잘못이 없었다. 나라는 인간의 마음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투명하게 파란 이 섬 오브 섬에서 스노클링을 해보기로 했다. 장난 삼아 물안경을 끼고 들여다본 적은 있지만, 바닷속에는 늘 무관심하던 한 인간이 난데없이 스노클이 궁금해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새벽같이 일어나 총총총 배를 탔다. 물안경은 어떻게 쓰는지, 호스를 어떻게 무는지는 대충 먼바다로 나가는 길 보트 위에서 배웠다. 미리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어렵지 않기 때문이겠지? 처음 신어보는 오리발 모양이 마음에 들었다. 그냥 별 생각도 기대도 없이, 천진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곧 엄청난 공포를 만나게 된다.


"이번엔 그냥 뛰지 말고... 다음에 좀 더 얕은 바다로 가면 도전해 볼까?"

처음 보트에서 뛰어내리기 전, 다시 생각하면 웃기지만 당시엔 진심으로 고민했다. 도저히 못하겠다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거진 포기하기 1mm 직전까지 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처음 보는 색깔을 뿜어대는 바다는 한눈에 담기도 버겁도록 광활했고 수심은 짐작도 되질 않았다. 코끝에 실시간으로 닥쳐오는 파도는 본 적 없이 거대했다. 당장 뭐라도 삼킬 것 같았다. 그야말로 미지의 공포 그 자체. 아무리 물을 좋아하는 나라도, 이런 깊은 바다 한가운데 떨어뜨려진 적은 없었다. 


"컴온! 컴온! 괜찮아!! 뛰어봐!"

모르는 손길을 따라 얼떨결에 질끈 용기를 냈다. 풍덩 뛰어내리는 기분이 명확하게 상쾌했다. 그 기분에 손끝이 저리고 이빨까지 달달달달 떨리도록 두 번 세 번 - 셈도 쉼도 없이 뛰어내릴 수 있었다.  시꺼멓게만 보이던 바닷속을 들여다보니 정말이지 환상. 환상 그 자체였다. 심해 생물들은 어둠 속에 콕콕 박힌 별처럼 색색가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모르는 광경이었다. 크고 작은 물고기 무리들이 버라이어티 한 빛깔을 자랑하며 날듯이 헤엄쳐 다니는 걸 보는데 절로 흥분이 됐다. 사진을 찍을 수 없다면 당장에 붓이라도 들고 색을 본떠 칠해서라도 남겨두고 싶은 지경. 그저 움직임만으로도 이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저걸 본 내 눈을 꼭 쥐고 간직하고 싶어. 


하이라이트는 기다렸다는 듯  얼굴을 보여준 만타가오리였다. 그 행운은 한 번에 그치지 않고, 크고 작은 꼬랑지를 네 마리까지 볼 수 있었다. 도무지 무덤덤해지지를 않았다. 심지어는 거북이도 만났다. 그렇게 보기 힘들다던 소문을 믿기 어렵도록 오래오래 눈앞 가까이 함께 헤엄치는 행복을 누렸다.  관심 없던 스노클,  왜들 하는 건지 백번 천 번 알게 됐다.



나는 이걸 보러 떠나온 게 아닐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무척 강력한 느낌이었다. 가장 원초적인 공포를 맞닥뜨렸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심장이 터져버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의 너머에는 소름 끼치는 감격, 감동 같은 것들이 있었다. 별 동요 없이 무난하게 만타가오리를 만날 수 있었더라면 제 아무리 행운의 만타라도 이런 감격은 없었을 거야. 강력한 경험은 예고도 겨를도 없이 정면으로 덮쳐온다. 피할 수도, 달리 망설여 볼 여지도 없다. 그냥 관통하며 무엇을 슬쩍 떨어뜨리고 다시 흘러갈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낚아 올려 내 안에 의미로 남겨둘지는 오로지 나의 몫이 된다.


“나 진짜 뛰어내리지 않았다면 정말 후회도 모른 채로 살았을 텐데. 그렇게 그냥 다른 삶을 살았을 텐데.” 다시 섬으로 돌아오는 길, 보트 위에서 찬바람을 맞는 와중에도 격앙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그동안 해왔던 용감한 결정들과 행동들이 스쳐갔다. 그때 용기 내지 않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아니 어떤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지를 상상하니 끔찍했다. 파릇한 시기 학교 대신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한 덕분에 보냈던  멋진 날들이 있었고,  방해도 반대도 많던 사랑을 택한 용기로 누린 최고의 순간들이 있었다.  실체가 희미한 모든 것은 두렵고 어렵다. 막상 두 눈 똑바로 뜨고 만져보고 깨뜨려 보면 별 것 아닌 경우가 많았다. 좀 다치더라도 차라리 속이 시원한 편을 택해왔다. 앞으로도 용기 내는 삶을 선택해야지. 호기롭게 뛰어들던 태도를 잃지 말아야지.  용기 낸 덕분에 만날 수 있었던 달콤한 장면들을 잊지 말아야지. 


쥐고 있던 고민들과 용기 내지 못하던 요즘의 날들이 스쳐갔다. 

나, 이제 다시 용기 내볼래. 

나는 정말 이 순간을 만나러 발리에 왔나 보다.

/

Nusa Lembongan 누사 렘봉안 

발리 남동부 3개 섬(Nusa Penida, Nusa Lembongan, Nusa Cengenan) 중 하나로 누사 페니다와 함께 한국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총면적 8㎢의 작은 섬 ‘누사 렘봉안(Nusa Lembongan)’은 윤식당으로 알려진 ‘길리섬’ 못지않게 맑고 투명한 에메랄드빛 바다를 만날 수 있다. 바글바글 시끌벅적한 관광지 보다 아기자기 한적한 섬, 우리 취향은 이쪽이었다. 악마의 눈물(devils’s tear)이나 맹그로브 등의 명소로 사랑받고 있으며, 발리섬에서 원데이 투어프로그램도 활발하게 운영된다. 전반적으로 한적하고 조용해 장관을 가까이 누리며 휴식을 취하기에 좋다. 사누르에서 스피드보트로 40분쯤 소요.


렘봉안의 바다

이 시골 섬에 펼쳐진 널찍한 바다 덕에 인피니티풀에 몸을 담그고 최상의 광경을 누리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내가 경험한 여느 멋진 인피니티풀보다 훌륭한 수준의 풍경이 눈앞에 있다. 이 시야라면 하루를 온종일 채워, 아니 며칠이라도 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가만히 있어도 심심하지가 않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믿을 수 없게 실시간 변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조리 빨려나가 사막 같던 바다가 한눈파는 사이 삽시간에 차오르고, 바다 색은 시시각각 새로고침된다. “이것보다 예쁜 색깔은 없겠다” 말한 뒤 얼마 안 되어 “어 있네?” 깨달을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다 색의 범위를 가볍게 넘어선다. 하늘색이 얼마나 많은데 '하늘색’이라고 칭하는지 이해되지 않는 것만큼 '바다색' 또한 특정할 수 없게 되었다. 시골 중에 시골인지라 대부분의 시야가 하늘 아니면 바다라 속이 확 트인다.  눈으로 해장하는 기분은 이런 게 아닐까. 해장한 지 오래돼서 잘 모르겠네.. 


Devils’s tear 악마의 눈물

렘봉안 섬은 생각대로 시골이었다. 물론 그래서 더 좋았다. 다만 멀끔한 대형마트는 물론, 발리에서 그 흔한 배달음식도 없다는 사실은 뚜벅이들에게 약간의 불편이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해가 급히 지고 나면 삽시간에 빛이 1g도 없는 듯한 쌔까만 어둠이 시작된다. 가로등? 당연히 없다.  어둠 속에서 비포장도로와 길짐승들 사이사이를 아슬아슬 걸어야 한다. 쫄보들은 무섭다고…. 그런 어둠마저 감수할 만큼 '악마의 눈물'의 일몰은 아름다웠다. 소다맛 뽕따 파도가 형광빛 태양을 삼키는 사이 사방이 모르는 색깔이 되었다. 밤도 밥도 중요하지 않았다.


악마의 눈물을 보고 돌아오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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