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감정일 뿐, 내가 아니다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퉁퉁 부은 잠결에 노트를 꺼내 들면서 깨달았다. ‘나 이번 여행에서 노트 처음 꺼내네?’
부정적인 정서는 어떻게든 해치우고 싶은 조급함이 따른다. 오래오래 옆에 두고 싶은 기쁨도 눌러쓰면 더 선명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급한 것은 이쪽이었다. 불편한 심기를 굳이 꺼내 눈앞에 구구절절 적어내리다 보면 뭐가 그렇게 불만스러운지 뭉뚱그려진 마음이 선명해진다. 나와 내 마음을 멀리 떨어뜨릴 수 있다. 문제 대상은 나 자신이 아니라, 그것 자체일 뿐이라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 문제가 명확해지면 해결할 방법 또한 뾰족해진다. 불만스러운 마음을 그대로 남겨두지 않고 내던져 해소하는 수를 자연스럽게 찾아내기 쉽다. 그리고 사실은 많은 경우, 결국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유난히 심기가 불편한 날이면 무기처럼 노트를 펼치게 된다.
저널링의 요지는 모르는 내 마음을 발견하는 데에 있다. 스스로의 마음을 미처 몰라서 일어나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 겹겹이 싸인 감정은 문제의 본질을 덮기 마련이다. 내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과정을 거치면 원인이 낱낱이 밝혀졌다. 좋고 싫음이, 기쁨과 슬픔이, 알 수 없이 켕기거나 어쩐지 신경 쓰이는 마음들까지 하얗게 드러난다. 내가 이런 마음인 것을 인정하기 싫을 때도 많다. 대단히 성스러운 마음 만으로 살아지지는 않으니까. 너무 하찮거나 치졸한 마음도, 지독하게 답답하고 괴로운 마음도. 똑똑히 확인하면 차라리 가벼워진다. 일단은 해결할지 흘려보낼지 만을 결정하면 된다. 결정하고 나면 상황만이 남는다. 좀 더 나은 방법을 찾고, 판단할 수 있다.
해결할 여지조차 없는 일이라면 그냥 지나가는 감정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잠자리가 불편해서 괴롭고 컨디션이 안 좋고 꿈자리가 사납고 뭐가 맘에 안 들고 어쩌고 저쩌고…이 정도의 마음이라면 투덜대기 시작하자마자 가벼워진다. 뭐야, 이게 전부야? 그래서 기분이 구린 거였어? 이 정도로 괴롭기엔 내 마음이 아까워서, 속 좁은 나를 그냥 웃어넘기고 말게 된다. 에라이 이 예민덩어리야. 굳이 손으로 눌러쓰는 불평은 차라리 지혜로운 감정 해소법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유도 모르게 어딘가 불편한 마음이 씨앗이 되어 도미노처럼 우르르르 하루를 망치는 적도 많았으니까.
‘내가 가장 유치해야지’ 작정하듯 쓰는 날것의 일기는 결국 감사와 다짐으로 끝나고야 만다. 손으로 쓰는 일기의 묘미는 여기에 있다. 그 흔한 ‘감사일기’는 언제나 부담스럽지만, ‘불평일기’는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쓰는 사이 자연스럽게 ‘그래도 감사한 것들’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지금의 마음을 어떻게 지혜롭게 흘려보낼지 다짐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패턴을 갖는다. 감사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하다 못해 내가 노트를 펼치고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 된다. 감사하다 보면 좋은 삶을 떠올리고, 옹졸하고 유치한 나를 수용하고 좀 더 나은 자신이 되기로 다짐하기 마련이다. 긍정의 마음이 충전되는 일련의 과정. 억지도 위선도 없이, 가장 귀여운 감정의 해소.
오늘도 쓰다 보니 알게 되었다. 해결할 것도 없고, 문제도 없고, 그냥 흘러가면 돼.
옳은 선택을 하는 판단력, 좋은 환경을 만들 능력을 갖겠다는 다짐만이 남았다. 너그럽고 유연한 마음을 갖자고, 과정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겨보자고. 나를 좀 더 편히 두라고, 배려에 지친 나를 좀 구해주라고. 내 마음을 다스려볼 수도 있었다. 이제 곧 떠나니까. 스쳐갈 여정이었으니까.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아쉬움 털어내고 기쁘게 다시 떠나봐야지. 다시 보니 또 아기자기 귀엽고 인간적인 곳이었다. 그래도 고마운 것들이 많은 시간이었다. 이제 드디어 섬으로, 섬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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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ur 사누르
여기저기 이동하기 쉬운 위치 덕에 장기 여행자들이 오래 머무른다는 도시 사누르Sanur. 요즘 화두에 오르고 있다는 사누르. 기대 이상으로 너무 좋다는 말도 꽤나 들려서 기대했지만 나는 사누르가 왜 좋은지 끝내 알아내지 못한 채 떠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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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땅 드래프트와 달팽이
이번 여행동안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것을 마셨지만, 유일하게 사누르에서만 우연히 만났던 반가운 것이 있다. 빈땅 드래프트. 발리 여행은 빈땅으로 시작해서 빈땅으로 끝난다고들 한다(나는 빈땅보다 싱아라자를 좋아하긴 하지만). 뭘 하고 뭘 봤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사누르에서 생 빈땅을 마시고 달팽이 요리를 먹었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할 수 있다. 아. 이곳이 유일하게 한국인을 마주친 곳이라는 사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