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일상 사이
언니가 가고파 했던 누사 렘봉안 섬과 내가 원하던 킨타마니를 지나, 이제 우붓으로 왔다. 우붓에서는 오붓한 빌라에서 좀 여유로운 일정. 우리는 또 어떤 장면들을 만나게 될까?
우붓에 도착해 짐을 내리자마자 동네 산책을 나갔다. 앞뒤좌우 온통 초록. 사방에 끝이 없는 초록 논밭, 그 길의 사이사이는 야자수로 촘촘히 채워져 있다. 떠나온 지 몇 주 만에 비로소 내가 발리에 와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내가 기억하는 발리, 그래 바로 이곳 우붓이로구나.
집에서, 집처럼 아침루틴
10시가 넘자마자 곯아떨어져 길게 길게 잠들어버린 아침. 집 같은 빌라에 들어왔더니 마음이 마냥 풀린다. 해 뜨는 시간에 잠깐 눈을 떴다가 커튼을 치러 가는 길이 너무 멀어서 일출 보기는 실패했지만 그냥 괜찮다고 쳤다. 원하던 걸 놓쳤다고 아쉬워했을 마음이 너른 해졌다. 커튼 팍 치고 아침 해를 구경하는 게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가장 중대한 아침 루틴이 되었다. 아파트 고층의 아침과 가장 다른 공기는 이때라고 본다. 이제 살살 집이 그립고 집밥이 생각나는데, 이 시간만큼은 그리움을 완벽히 상쇄시키는 사랑스러운 순간이다.
오랜만에 매트를 펴고 앉아 스트레칭을 했다. 졸졸졸 수영장 물소리를 배경 삼아 따땃한 해를 등진 기분이 선명하게 평화롭고 희망차다. 여행지에서는 가지각색의 상황에 따라 온전히 나일 수 없고, 때로는 가장 온전히 나일 수 있다. 낯선 풍경에다 일상적인 일들을 끌어오면 여행과 일상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특별한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게 되고, 익숙했던 것들이 또 새롭게 느껴진다. 어떤 것은 그립고, 어떤 것은 여전히 즐겁고, 어떤 것은 이렇게 좀 더 기쁘게 만들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익숙해진 일상을 어떻게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배운다는 건, 어쩌면 여행의 가장 큰 기쁨이다.
의자를 멀리멀리 끌어와 대충 안 맞는 쿠션을 깔고 앉아 침대 난간에 커피잔을 놓고 잠깐 책을 읽었다. 엉댕이에 균형을 잠깐 잘못 잡으면 자빠져 코도 깨지고 잔도 깨질 것 같은 불안함이 어쩐 일로 재밌었다. 여기서 이런 모양으로 앉아서 책을 읽고 싶고, 저기에서 이런 느낌으로 뭘 하고 싶은 디테일이 많은 나는 항상 필요한 도구도 많고 짐도 많았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상상했던 완벽의 환경을 만나기는 어렵다는 걸 알게 된다. 바리바리 챙겨 온 짐은 몇 주가 지난 오늘까지 건드리지 않은 부분이 더 많다. 뭐가 어디에 들었는지 찾아내는 스트레스도 커서 그냥 포기하고 말아 버린 적도 실은 많았다. 내 의지대로 조성된 완벽함도 소름 돋게 짜릿한 일이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대충대충 유연하게 상황을 만드는 것도 꽤나 즐거운 일이었네.
잠에서 깨어난 언니가 눈을 마주치자마자 깜짝 놀라며 뱉어내듯 말을 했다. “어우. 왜 이렇게 까매.” 나는 그새 많이 까매졌다. 건강해 보이는 게 마음에 든다. 자꾸만 많이 먹고 그대로 잠들어서 몸이 부푼 느낌이 드는 김에 아침운동을 하기로 했다. 마당에서 개미랑 운동하고 그대로 수영장에 골인하는 상쾌함! 이번에는 딱 내가 상상하던 그림이 고대로 현실로 옮겨졌다. 오늘도 대충 완벽한 굿모닝이다.
/
우붓 탐험의 날
지도도 목적지도 없이 그냥 아무 데나 걸어보기로 한 어떤 날, 증말 최고의 하루를 보냈다.
딱히 유명한 길이 아니지만 좀 더 넓고 다닐만한 길이라 나란히 걸을 수도 있고 멈춰서 가게들을 구경할 수도 있다. 아무도 없는 논밭을 질러 걸어 볼 수도 있다. 기대 없이 떠나는 가벼운 탐험의 길에는 작은 일에도 쉽게 기뻐할 수 있다. 모르는 길을 따라 재밌는 가게를 구경하고 멈춰 섬을 반복하면서 기이한 풍경을 많이 만났다. 우연히 만나 더더욱 반가운 주말마켓! 에서 과일을 한 아름 사 다시 길을 걷는다. 수련의 성지라는 우붓에는 요가원이 많고 길에서도 수련의 기운을 풍기는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골목골목 즐비한 비건 레스토랑과 오가닉 카페들을 생각 없이 구경하다가 창 안에 명상 중인 얼굴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내 에너지까지 급격하게 바뀌어버리는 동네. 몰입된 사람들이 주는 에너지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나에게 건강한 것을 주고,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 진다.
/
화덕에 구운 하와이안피자와
롱 아일랜드 아이스 티
우리가 손꼽는 이번 노라빈발리 최고의 식사 중 하나. 우붓 탐험 중 우연히 만난 초록뷰 피자집이었다. 환장하는 파인애플피자를 화덕에 구워버렸네. 롱티 맛은 또 어떻고? (*롱아일랜드아이스티 long island iced tea. 희한하게 내가 어려서부터 꾸준히 좋아하는 유일한 칵테일)
너무나도 신이 나버린 나머지 칵테일 대잔치가 시작됐다. 헤밍웨이의 슬럼프 탈출을 도왔다는 일등 공신, '다이퀴리Daiquiri'에 이어 언니가 좋아하는 마가리타, 개운하게 마티니로 마무리하고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행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