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참았지 뭐
솔직히 많이 참았다. 인천에서 이번 여행을 앞두고 쓴 일기 맨 첫 줄에는 <참지 않기>라는 말이 쓰여있었거늘, 나는 스스로의 마음을 배신하듯 하루하루 꾹 참고 있었다. 이것이 온순하지도 무난하지도 않은 나란 인간에게서 나온 발언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겐 분명 놀랄 일이겠지만, 사실 나는 정말 이것저것 많이 삼키며 살아가고 있다.(응 그게 참는 거야…) 더구나 이번만큼은 정말 언니를 위하는 마음으로 떠나온 여행이잖아….
참지 않아도 될 일까지 삼켜버리는 나를 자주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나 또한 괴롭고 갑갑한 일이었다. 내장까지 참는 습관에 절여진 기분이었다. 사지가 의식보다 먼저 움직이는 적이 많았다. 마음과 다른 말을 하는 때도 많았다. 그런 나를 보는 언니의 마음도 불편할 터였다. 상대의 기분을 기막히게 읽어내는 우리였으니까.
여행이 길어지면서 덮어둔 갈등이 삐쭉 삐죽 터져 나오는 상황이 반복됐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이 무리한 배려가 되어, 오히려 공기를 부자연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누구 하나 편치 않은, 배려 아닌 배려였다.
“대체 뭘 원하는데? 어쩌라는 거냐고!”
결국은 큰소리가 오갔다. 하필이면 그곳은 알라스하룸Alas harum. 뜨갈랄랑의 중심이자 요즘 가장 뜨겁고 멋진 곳.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파티음악이 흘러나오고 다른 한쪽에서는 발리스윙이라는 엄청난 그네의 궤적을 따라 괴성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며, 사방을 둘러싼 초록 논 길과 사진 삼매경에 빠진 관광객 행렬이 다각도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참 다이내믹하게 흥겨운 곳이었다. 그곳에서 불행해 보이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끝내 우리는 흩어졌다. 층층이 계단식 논길 사이를 멀리 떨어져 걸었다. 촘촘히도 아름다운 그곳을 각자의 마음으로 구경했다.
뜨갈랄랑의 중심에서 소리치던 장면은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화를 잘 안내기도, 화가 잘 안나기도 하는 사람이니까. 결국 혼자 뒤돌아서는데 울분이 터졌다. 이렇게 사랑하는데, 이렇게 노력하는데, 이렇게나 맞추기 어려울 수 있다니. 이 세상에서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라고 여기던 마음이 배신당한 것 같았다. 다들 결혼은 어떻게 하는 거야?… 아니 그래도 그렇지. 나를 저렇게나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다니… 마지막 장면을 잘근잘근 씹으며 논길을 걸었다. 그런데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충격적인 언니 표정만큼 놀라운 것은 방금 전 내 입에서 나왔던 말이었다. ‘뭘 원하는지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내내 불편한 티만 내면 어떡하냐고’. 아니, 그거는 내가 잘하는 거잖아…? 당해보니 이렇게 고통스런 일이었네???… 이날로 나는 역지사지를 또 한 번 새겼다. 싫어하는 내 모습을 타인에게서 발견했을 때 가장 못 견디겠는 것이었다.
차라리 우리는 서로를 덜 배려할 필요가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살피기보다 각자의 마음을 살피는 일이 오히려 시급했다. 자기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일은 언제나 중요했지만, 이 관계에서 만큼은 어쩐지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무리한 배려로 오히려 서로를 더 괴롭히고 있던 것이 아닐까.
사랑하기 때문에 더 많이 상처받는 일. 그럼에도 내 인격을 탓하게 되는, 상처 한복판에 오래 머물러 방법을 고심하게 되는 일. 관계의 지혜를 난폭하게 배우는 경험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너무 괴롭네….)
우붓에 머무는 동안 차라리 인적 드문 시골 논길만 걸었더라면 온전히 ‘치유’의 땅을 만끽할 수 있었을 터지만, 그래도 보여주고 싶은 것들과 가고 싶은 곳들이 있었기 때문에 시내를 다녀야 할 일도 많았다. 걷기를 좋아하는 우리인데도 딱 메인 거리 쪽 말고는 도보로 다니기에 길이 좋지 않아서 예민해지기 쉬웠다. 누군가를 지키려는 마음은 더 많은 여유를 요한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나는 스스로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찬 사람이 아닐까, 내 마음의 그릇이 의심되는 날들이었다.
어떤 날은 일정의 시작부터 '흥정'을 요하는 마켓에 갔던 탓에 에너지를 좀 소진했는데, 일정을 마친 밤 어쩐지 기분이 가볍고 유쾌하지가 않아서 돌아봤더니 흥정구매의 장면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구매하는 것만이 이곳 쇼핑 특유의 재미이고 목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상인들의 얼굴이 마음에 체기처럼 걸려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충분히 친절했나? 우리는 서로에게 기분 좋은 순간을 만들었나? 내 영혼의 아름다움이, 내 인성의 격이. 성장하고 있는 게 맞을까?
우붓에서는 그야말로 극과 극의 마음을 모두 만났다.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편안한 날도, 지긋지긋 괴로운 날도 있었다. 당장이라도 집에 돌아가고 싶다가 하루라도 더 머물고 싶었다. 이곳에서의 일정이 충분히 여유로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흘러갔다고 느끼고 있다. 스위치가 내려가듯 정확하게 떨어지는 체력에ㅡ 의욕처럼 많은 것을 경험하지 못한다. 애당초 ‘어디 어디서 꼭 가봐야 할 곳!'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어쩐지 아쉽지는 않을까 좀 더 해볼 수 있는 게 있을까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미련을 두지 말 것. 그저 현재에 머물 것… 내가 원하는 삶의 지침과는 자꾸만 멀어지는 기분이 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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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ud 우붓
우붓은 이름 자체가 ‘치유ubud’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신도 치유받았는가 묻는다면 글쎄요.라고 답하겠고,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다시 돌아가겠노라 덧붙이겠다. 우붓에서의 일주일은 너무 짧았다.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 영원히 나아지고 또 나아가고 싶다. 우붓이 치유의 땅이자 수련의 성지라면, 언제고 기꺼이 다시 돌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