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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히유영 Jul 09. 2019

돌잔치에서 생각하다

개인과 가족 집단에 대한 고민  

2012년 지인의 지인 돌잔치 참석 이후 처음이다. 친구 아기 돌잔치를 다녀왔다.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는데, 뭔가 달라졌을까 내심 기대했다. 그러나 세상에...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나의 마음도 그대로다.


아기의 첫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인데, 나는 아기의 생일을 축하할 마음이 있는가. 글쎄, 난 아기 엄마를 보고 싶었다. 아기 엄마가 어렵게 준비한 행사에 참여하고픈 마음이 컸다. 아기 얼굴보다는 아기 엄마 얼굴이 더 궁금했고, 1년간 아기를 키우면서 어땠는지, 어떨 때 힘들었는지, 기뻤는지... 아기 엄마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초대받은 자인 '나'에게 중요한 건, 아기보다 날 초대한 아기 부모다. 그 마음이 7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돌잔치에서 한 시간 남짓 시간을 보내며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아기 엄마 얼굴은 저 멀리서만 보이고, 신부 화장을 한 아기 엄마는 아기를 챙기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밥 맛있으니까 많이 먹고 가세요.

밥 맛있게 드셨어요?

아쉽게도 이날, 아기 엄마와 나눈 대화는 이게 전부다. 첫 인사도 밥, 끝 인사도 밥 얘기였다. 돌잔치에서 음식은 중요하다. 돌잔치에 들인 시간과 돈이 음식의 질로 치환된다. 낸 돈과 음식의 질이 동일하면 다행. 음식이 별로면 손해본 듯. 낸 돈에 비해 음식이 넘 비싸고 좋으면 미안.


생각해 보면, 돌잔치나 결혼식에 다녀와서 음식에 대한 얘길 많이 하는 것 같다. (물론 결혼식은 신부의 얼굴이 가장 먼저 도마에 오른다. 허나, 돌잔치는 아기에 대한 그 어떤 것도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슬프다.)


어느 정도 음식을 먹고 나니 행사가 시작됐다. 돌잡이, 하객에게 선물 전달, 영상 상영. 끝. 아기 사진 몇 장과 몇 개의 영상 클립을 템플릿 안에 담은 영상. 그걸 보는 사람은 앞에 앉은 몇몇 가족들 뿐이었다. 아기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관심있는 건, 아기 부모와 조부모 뿐이다.


영상에 이렇게나 관심이 없는데도 잔치 자리에는 꼭 영상이 등장한다. 없으면 서운하지만, 있어도 모두가 심드렁한 영상. 어떤 매체보다도 영향력이 센 '영상'이 잔치 자리에서는 이렇게 찬밥 덩어리가 되다니. 영상인으로서 매우 아쉽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단, 보통 일반 개인이 주인공이 되는 행사에는 무작위의 사람들이 온다. 결혼식, 환갑이나 칠순 잔치, 돌잔치, 장례식이 그렇다. 주인공의 지인, 지인의 지인, 지인의 지인의 지인들이 참여한다. 사람이 많을수록 신명날 것 같지만, 크고 화려한 행사에는 '돈'이라는 그림자가 따라 붙는다.


참여비를 내고, 밥을 먹는다. 얼굴 도장을 찍는다. 그걸로 나의 임무는 끝. 주인공을 축하하거나(결혼식, 돌잔치) 주인공에 대한 기억, 애도(장례식)는 현대 사회에서 별 의미가 없다. 여러 감정들이 스칠 수도 있지만, 바쁜 세상에서 타인의 가족 행사는 어떤 걸까. 아예 모르거나, 애매하게 아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행사일 뿐일 때가 많다.


행사를 치르는 당사자들도 정신 없기는 매한가지다. 행사 도중 감격스러운 순간도 있겠지만, 그 순간도 행사에 묻혀 금방 흘러간다. 행사가 끝나고 침대에 털썩 누워버리면 한숨이 '푹' 나오고, '드디어 다 치러냈다!' 하는 성취감이 피곤함과 함께 몰려온다.


우리나라 행사 문화가 대개 이렇다. 개인이 주인공이 되는 행사는 실제론, 그 개인이 주인공이라기보다는 가족 집단의 행사다. 난 하고 싶지 않아도, 부모님이 원하면 해야 한다.


내 결혼이 아빠의 친구들에게 무슨 의미가 그리 있을까.

내 결혼이 엄마가 다니는 교회 권사님들에게 뭐가 중요할까.

내 아기의 첫 생일에, 직장 동료가 와서 몇 만 원을 내고 뷔페를 먹을 이유가 무언가.


장례식은 어떤가.


죽음은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생이 종료된 사건이다. 고인의 인생을 가족, 지인들이 정성스럽게 돌아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고인의 가족을 위로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 이상으로 고인을 기억하며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간혹,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장례식에 갈 때가 있다. 영정 사진 속 인물에 대해 전혀 모른 채, 멀뚱멀뚱 있다가, 상주와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육개장을 급하게 먹는다. 그리곤 또 어색한 인사를 하고, 또는 그냥 조용히 식장을 빠져 나왔을 때가 있었다. 나에게 그 장례식은 어떤 의미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반면, 좀 색다른 장례에 참여한 경험도 있다. 존경하던 다큐 감독의 장례식이었다. 그와 일면식도 없었지만, 그의 영상과 글에 많은 영향을 받은 터라, 마지막 가시는 길에 함께하고 싶었다. 영정 사진은 지인의 지인의 지인의 장례식과 다르게, 익숙했다. 마음을 다해 기도했다. 장례식장에는 큰 모니터가 놓여 있었고, 그의 생전 모습을 볼 수 있는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투병 기간 중,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제작한 다큐도 볼 수 있었다.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를 오래오래 기억하고픈 마음이 들었던 장례식이었다.   


엄마 아빠 얼굴 봐서 제대로 치뤄야지

엄마가 뿌린 돈이 얼만데, 니가 그러면 되니?

대한민국 사회는 아직도 개인보다 집단이 중요하다. 가족이라는 집단은 특히 개인을 매우 작게 만든다. 개인에게 중요한 일을 집단의 행사로 전락시키는 것도 가족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가장 소중한 존재도 가족 아닌가. 사랑하는 가족이 내게 중요한 만큼, 그 가족 구성원에게 중요한 일도 소중히 여겨주는 문화를 원한다.


내 딸의 결혼은, 내 '딸'에게 일생일대의 일이다.

내 아이의 첫 생일은 '아이'에게 가장 중요하다.

내 부모의 장례는 가족 뿐 아니라, 고인을 기억하고 애도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결국, 집단의 당위성보다는 '개인'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이기적인 개인이 되자는 말이 아니다. 개인을 충분히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거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돕는 매개도 필요하다. 어느 감독의 장례식에서 봤던 생전 영상이 그 예다. 개인이 개인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매개, 그리고 서로를 향한 진심이 한 곳에 모인다면 그보다 가치있는 자리가 있을까.  


획일적으로 고착된 가족 행사 문화는 바뀔 필요가 있다. 개인에게 기쁘고 슬픈 일로 모이는 자리에선 개인과 개인이 마음으로 소통하는 자리어야 한다. 주인공인 '개인'과 손님으로 오는 '개인', 그 어떤 누구도 소외당하지 않아야 한다. 개인을 소외시키는 개인 행사가 아니라, 개인이 개인에게 상호 집중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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