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아시안 성소수자들의 'Full moon festival'
밤새 내리던 비가 그쳤다. 그래도 먹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은 여전하다. 아직 낮인데, 달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어두운 느낌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인사한 인도인 Ravi(가명) 씨는 “하늘이 ‘보름달’ 축제를 위해 준비된 것 같다”며 미소 짓는다. 아마도 같은 곳을 찾은 이인 듯하다. 뉴욕의 아시아인 성소수자가 대보름을 맞아 함께 모이는 ‘Full moon Festival(대보름 축제)’ 말이다.
Ravi 씨의 두 손에는 상자 두 개에 나눠 담은 야채 볶음밥이 들렸다. 명절을 지키는 마음으로 모이는 사람들과 나눌 음식이다. ‘양손은 무겁게, 발걸음은 가볍게’라는 농담이 생각난다. 채식주의자 친구들이 참여하는 자리라 고기 없는 음식을 따로 준비했다. 물론 직접 요리한 건 아니지만, 마음을 나눈다는 게 중요하지 않던가.
함께 행사가 열리는 5층에 내렸다. 아시아인 성소수자들이 어머니처럼 여기는 클라라 윤 씨가 그를 반긴다. 클라라 씨는 고향을 떠난 자녀가 집에 온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안아준다. 사람들은 각자 그 나라의 고유한 음식을 준비해 왔다. Ravi 씨도 야채 볶음밥을 식탁에 살포시 올린다.
오랜만에 만난 이들은 함께 식사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그간 있었던 일들도 나눈다. 아직 가족에게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한 한국인 민재(가명) 씨는 지난 추석 명절에 잠시 모인 가족들과 있었던 어려움을 말한다.
“교회에 다니는 부모님이 미국의 성소수자 문제를 걱정했다.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을 이해한다. 아직 커밍아웃하지 못했지만, 나를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안다. 교회에서 성소수자에 대해 하는 말들도 이해한다. 나도 예전에는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커서 목사가 되고 싶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래서 잘 이해한다.”
중국인 여성 커플은 서로 음식을 떠준다. 이들은 대학에서 공부 중이라 주로 학업의 어려움을 사람들과 이야기한다. 음료가 준비된 방에서는 몇 사람이 병맥주를 들고 윷놀이를 하고 있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모임에 처음으로 나온 이들과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다.
모임에 온 지 한 시간쯤 지나자, 클라라 씨와 일본인 성소수자 어머니인 에이미(가명) 씨가 큰 방으로 참석자들을 불러 모은다. 사람들은 방에 마련된 소파나 테이블에 걸터앉는다. 바닥에 앉거나 선 채로 자리를 잡는 이들도 있다. 두 어머니는 먼저 모임의 취지를 설명했다. “오늘 대보름 축제는 가을 명절을 맞아 아시아 성소수자들이 모여 편안하게 즐기는 ‘가족 모임’”이라며, 참여한 이들을 환영하자 모두 환호했다.
먼저 성소수자 아들과 함께 모임에 처음 참석한 중국인 어머니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회자는 “아들이 커밍아웃하고 오랜 시간 고민했던 그녀가 아들의 성 정체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고, 아들을 지지하기 위해 이 자리에 참석했다”고 설명했다. 아들인 성소수자 창(가명) 씨는 어머니에게 무지개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참석자들 모두 함께 기뻐하며 크게 환영했다.
창 씨는 어머니와 아시아 성소수자를 위해 노래했다. 노래 부르기에 앞서 참석한 이들을 위로했다. “어머니는 다행히 내 커밍아웃을 받아주었지만, 가족에게 환대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노래하고 싶다”고 했다. 중국에서 부모를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로 잘 알려진 ‘그 많은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를 열창하자, 모임은 울음바다가 됐다. 특히 가사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는 중국계 성소수자들은 더욱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날 모임에는 성소수자 모임에서 노래 잘하기로 알려진 이들이 특별한 무대를 마련했다. 미성의 창 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몇 명은 자신들의 모국어로 된 노래를 불렀다. 어떤 이는 영화 주제곡을 부르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했다.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서로 위로하며 손을 잡아주었다.
이날 축제에는 성소수자 지지자들도 함께했다. 한인 지지자 이성민 씨는 성소수자 인권문제는 모든 소수자의 문제라고 생각해 동참했다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차별받는 이유는 똑같다.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는다. 아시아인이라서, 한국인이라서 이 땅에서 차별을 경험한다. 그런데 우리 아시아 커뮤니티, 한인 커뮤니티가 성소수자를 차별한다. 차별을 경험해 아픔을 아는 사람들이, 왜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고, 차별을 이겨내야 할 동료다. 같이 살아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편안하게 모여 식사를 한다. 누구도 흘겨보지 않는다. 그저 일상을 나누며 이야기한다. 성소수자들이 서로의 가족이 되어준다. 밤이 아닌데도, 여전히 모임 장소 밖은 어둡다. 그리고 성소수자들은 세상 모든 사람을 한자리에 모여 앉게 할 보름달이 뜨기를 기다린다.
인천 퀴어퍼레이드가 지나고 추석이 다가오니, 뉴욕에서 잠시 지낼 때 초대받았던 아시안 성소수자 추석 행사가 떠오릅니다. 성소수자 관련한 인식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미국 내 아시안 커뮤니티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가끔 한국 사회보다 더 보수적인 시각이 느껴질 정도지요. 명절을 맞아 가족 모임에 참여했다가 힘든 시간을 보내는 아시안 미국인들이 많습니다. 이 모임에 다녀온 후, 이들의 가을 명절이 더는 힘겹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인식 변화가 중요하다는 생각도 많이 했고요. 현재 한국 상황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부디, 한국 성소수자들을 위해서도 차별 없이 모여 앉을 보름달이 뜨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