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싸움에서 반일운동을 돌아보기까지 by 유자까
아내와 다퉜다. 감정이 격해지니, 다툼도 이어갈 수 없었다. 이러다 큰일 나지 싶은 생각이 든다. 냉각이 필요하다. 집 밖으로 나왔다. 쉽게 갈 곳을 찾을 수 없었다. 폭염이다. 급히 집에서 가까운 카페로 향했다.
아뿔싸, 스마트폰을 두고 나왔다. 집에 돌아가기까지 무엇을 한단 말인가. ‘답답하고 심심한 몇 시간을 보내야 하겠구나.’ 다행인 건 카페를 찾는 사람이 다양하고 많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사람들을 관찰하며 혼자만의 세상에 빠진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회색 스트라이프 셔츠를 입은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이다. 카페에 들어오자마자 작은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연신 얼굴을 닦는다. 더위가 채 식지 않은 나는 그를 부럽게 바라보았다. 나도 물티슈로 닦고 싶어서였을까. ‘아저씨를 넘어 노인이 되고 있구나.’ 혼자 슬퍼했다.
젊은 두 남녀가 들어온다. 정장 차림의 두 사람. 보기만 해도 덥다. 심지어 남성은 검은 슈트다. 연인인가 싶었는데, 옆자리에 앉아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회사 선후배 사이인 듯하다. 연하인 여성이 선배였다. 남성은 연신 "선배, 선배"라고 부르며 아양을 떤다. 그런데 마주 보지 않고, 서로 옆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에, 상상력 발동. 혼자 드라마를 쓰고 있다. 남녀만 보면 연애 드라마를 그리는 모습이라니. ‘그냥 나이만 먹은 게 아니라 꼰대가 되었구나.’ 혼자 절망했다.
주문한 음료를 받으러 갔다. 친절하게 웃으며 맛있게 마시라고 인사하는 점원이 고맙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손님이 무척 많은데도 친절함을 잃지 않다니. 마음이 좋다. 그런데 더치커피를 아이스로 주문했는데,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친절한 직원에게 항의하러 가려는데, 영수증에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찍혔다. 머릿속으로는 아이스 더치커피를 생각하고, 주문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했던 것 같다. ‘나이 마흔에 벌써 치매가 오려나.’ 혼자 어이 상실.
얇은 금목걸이를 하고, 가로세로 20cm 크기의 가죽 일수 가방을 겨드랑이에 낀 남성이 들어온다. 신기하게 손목은 시계가 아닌 금팔찌로 둘렀다. 상상력을 자극하려면 영화에서 본 뚱뚱한 남성이어야 할 텐데, 운동하다가 쉬는 정도의 좋은 몸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받아들고, 한 잔을 ‘쭙쭙’ 빨면서 나간다.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데, 일수하는 사람으로 바라보다니.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구나.’ 혼자 아쉬워했다.
맞은편 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이 무언가 수첩을 꺼냈다.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는 걸 보니, 노안인가? 연세가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아니, 동안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치즈 케이크를 주문한 그는 사색에 잠긴 듯하다. 마치 영화 ‘시’에 나오는 배우 윤정희가 생각이 난다. 혹시 시라도 쓰는 걸까.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가벼운 옷차림인데도 중후한 느낌이 든다.
물론 그런 생각은 몇 분 만에 깨졌다. 화장실을 다녀오며, 슬쩍 수첩을 보는데 일어가 적혔다. 통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일본어다. 순간 모든 상상이 중단됐다. 반일감정이 극에 달한 시기, 동네 카페에서 만난 일본인이 그냥 어색하게만 보였다. 신도시에 이런 차림으로 나온 일본인이라면, ‘한국 남성과 결혼했나?’, ‘일본인 출입금지 식당이나 카페도 생겨난다는데 괜찮은가?’ 이런 생각이나 하고 앉았다.
아내와 싸운 날, 시원한 에어컨 아래 혼자 앉아 눈앞에 다가온 반일감정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조선 시대 왜구의 침략도, 일제강점기도 경험하지 않았는데, 내 안에 오롯이 존재하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단순한 민족주의가 발현된 것일까. 일제에 징용을 세 번이나 다녀와야 했던 외할아버지의 고통스러웠던 이야기 때문일까. 성노예 피해자들의 억울함이 여전해서 그런 것일까.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일본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역사 교육이 심어준 공동체의 기억이 일본에 대한 트라우마로 작용하는 상황 안에서는 그들이 미울 수밖에 없으니. 이 상황을 넘어설 방법은 누군가 지적한 말처럼 민족주의를 벗어나는 것밖에 없을까. 일본이 제대로 사과하고 역사적 잘못에 매듭 짓는 방법은 없을까. 뭐, 일본의 기득권을 쥔 이들이 전범 후손들이니 그런 일은 없겠지.
바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은 카페에 오래 앉아 있지 않다. 많은 사람이 오간다. 한 여성이 아이 셋을 데리고 왔다. 딸 둘에 아들 하나. 그것도 막내아들. ‘아들을 낳으려, 두 딸을 낳았나?’ 내가 아무래도 미쳤나 보다. 이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다니. 정말 꼰대 중에 상 꼰대가 된 기분이다.
아이가 넘어졌다. 이 와중에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다 엄마를 쳐다본다. 애들 좀 잘 관리하지 이런 눈이다. 시끄러운 아이 셋을 곱지 않게 바라보는 당연한 상황이랄까. 그런데 일본 여성만 아이에게 다치지 않았는지 묻는다. 웃으며 아이를 일으키고 웃어준다. 그리고 모두 스마트폰이나 랩톱을 꺼내 들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여성은 홀로 책을 꺼냈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을 일본어로 된 책을.
여러 상황을 보고 상상하다, 혼자 괜히 민망해지는 이 기분 무엇.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러 가는 게 좋겠다. 일본 기득권이 잘못을 사과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사과하지 않는다면 가정에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가 될 뿐일 테니. 이런 일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사랑해 결혼한 사이도 한일관계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겠지. 아내를 위해 ‘아이스 더치커피’를 한잔 주문해야겠다. 이번에는 머릿속으로만 말고, 꼭 입으로 주문해야지.
p.s. 집에 가려는데, 일본인 여성이 우리말로 남편과 통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남편 직장이 이 건물에 있나 보다. “아래에서 기다린다고 말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안 와?”라고 언성을 높인다. 역시, 부부 사이는 쉽지 않다. 국제 관계만큼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