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었다. 내게 뻗은 손을 그런 식으로 밀치다니. 지하철 개찰구를 지나, 대합실에서 열차를 기다리면서 계속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 들어 괴로웠다. 사실 별 일 아니었다. 한 중년 남성이 차비가 부족하다며 2,000원만 충전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런데 난 퉁명스럽고 짜증스럽게 “1,000원 밖에 없다”며, 그 손에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주었다. 출근 시간에 늦을까 예민해졌던 터였다.
개찰구를 지나는데, 뒤통수를 맞은 듯 아찔해졌다. 평소 사람을 그렇게 대하지 말아야 한다고 설파하던 내 모습이 스친 탓은 아니다. 덥수룩하니 수염을 기른 남성 손에 들린 카드가 떠오른 까닭이다. 5,000원이나 1만 원을 충전하고, 내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될 일이었다. 그분이 바란 건 돈이 아닌, 교통 이용에 사용할 수 있는 조금의 도움이었는데. 내가 한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대합실에 앉아 지하철을 한 대 지나 보내며, 아주 조금 울었다. 1,000원을 쥐어주며, 그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었던가. 누군가를 모욕하고 떠오르는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뭐, 내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이런 생각을 하느냐.’ 속으로 이 말을 되뇌며 스스로 달랬다. 그런데, 이 아침 내가 한 사람에게 1,000원으로 한 모욕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오후가 다 지나가고 저녁이 되었는데도, 나는 지금 이 생각에 사로잡혔다.
일터에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또, 눈물이 나오려 한다.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었을 때, 다시 나가 사과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에게 모멸감이 들게 했던 내 행동은 바쁘다는 핑계로, 개찰구를 다시 나갔다가 들어올 교통비가 아깝다는 이유로, 내 자존심 문제로 그냥 지나갔다. 내게서 떠났다. 돌이킬 순간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내 양심만 괴롭히다 끝나면, 비용적 측면에서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오후 내내, 합리화는 다양하게 이뤄졌다. 내 탓으로 돌리기에 내게 이 사건이 준 충격이 컸나 보다. 먼저, 가장 가까운 사람을 탓했다. 조금 천천히 나가도 되는데, 내 발길을 재촉한 아내를 원망했다. 사람 다급해지게 왜 빨리 길을 나서라고 다그쳤을까. 지각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느긋한 사람인데, 아내 말에는 왜 이리 영향을 받을까. 그러다 다시 속으로 말한다. ‘이건 아니지.’ 지각하지 말라고 한 사람을 탓할 이유가 없다. 내 게으름이 문제겠지.
다음으로 오늘날 짜증 나게 한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안 끼던 이어폰을 가지고 나와서 그런가. 도움을 요청한 분이 내게 말을 걸 때, 짜증 나듯 이어폰을 뺐다. 이어폰만 없었어도 그분 상황을 더 들었으려나. ‘평소 이어폰을 안 쓰는데, 오랜만에 무언가 들을 생각에 이어폰을 들고 나와서 그랬구나. 이어폰이 문제였네. 사람은 역시 주변 소리를 듣고 다녀야 해. 다시는 이어폰을 들고 나오지 않으리.’ 혼자 마음먹었다.
그러다 ‘아니, 3년을 기른 머리를 묶지 않아서 그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이 내게 말을 걸 때, 앞머리가 내 눈을 가려서 짜증이 조금 났던 것이 생각났다. 거추장스러운 머리를 잘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 퇴근 행 지하철이 왔다. 양심에 찔린 일이 있어도 퇴근은 해야 한다. 다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지만 지하철을 탔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하니까.
합리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잠실나루 역을 지나 강변으로 가는 잠실철교를 지나던 순간, 해지는 하늘 아래 다시 눈물을 흘렸다. 양심은 지하에서 합리화한다고 돌아오지 않는다. 하늘을 만나는 순간 뭉개진 양심은, 누군가에게 인간이기를 거부한 나를 불러 세운다. 내가 인간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내게 사죄하라고 외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