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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히유영 Jul 21. 2019

남편이 해 준 집밥 먹고 싶은 아내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남편의 인건비는? by 유자까

모든 일은 다 먹고사는 것에서 시작한다. 내 기억 속 우리 부부의 애틋함도 밥에서 출발한다. 결혼하면서 프리랜서로 활동한 나는, 몇 개월 동안 매일 아침 4대 보험이 적용되는 직장에 출근하는 아내를 위해 밥을 지었다. 점심에 먹을 도시락도 챙겼다. 여느 신혼부부처럼 훈훈하고 즐거운 아침을 맞았다. 


아내는 내 요리 솜씨에 만족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양파와 어묵은 매일 볶았다. 찌개와 국은 매일 바뀌었고, 아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어떤 음식이든 다 만들었다.(인터넷에 노하우를 공개한 모든 레시피 콘텐츠 제작자에 고마움을 표한다.) 밥을 먹을 때면 늘 “오빠 음식을 왜 이렇게 잘해”라고 물었다. 오랜 자취 생활로 취득한 소소한 스킬에 만족하는 아내에게 늘 고마웠다. 물론 내심 ‘날 주방돌이로 만들려는 말인가’라고 의심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 요리에 만족한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당시 내가 음식을 준비한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먼저, 가장을 위해 밥을 하는 게 당연하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가부장제의 노예라고나 할까. 나도 돈을 벌었지만, 갓 프리랜서가 된 내 수입은 아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물론 지금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이어질 대출을 생각해도, 프리랜서보다는 4대 보험이 적용되는 정직원인 아내가 가장이었다. 아내에게 잘 보여야 할 중요한 이유라고나 할까. 


사실 앞선 이유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아내가 요리를 전혀 할 줄 몰랐다. 결혼 전 아내는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내 어머니는 “결혼하면 고된 집안일을 계속해야 하니,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단다. 그렇게 32년을 지내고 결혼한 아내는, 전기압력밥솥에 밥도 얹을 줄 몰랐다. 정말 먹고살려면 내가 밥을 해야 했다. 자취하면서 각종 음식을 해 먹었기 망정이지, 둘이 정말 고생할 뻔했다. 


밥으로 행복했던 날은 반년이 가지 못했다. 내 프리랜서 업무가 늘어나고, 아내 야근이 잦아지면서 밥을 먹을 날이 많이 줄었다. 아내가 야근을 하니 저녁 식사를 함께할 수 없었고, 나는 새벽까지 수정해서 보낼 작업물이 생기면서 아침을 준비할 수 없었다. 아내 직장 동료들은 “남편 사랑이 식었네”, “얼마 못 간다고 했지”라며 놀렸다고 한다. 조금 많이 미안했지만, 어쩌겠는가. 현실은 현실이니. 


하여튼 바쁜 날을 지내며, 외식이 많이 늘었다. 외부에서 회의나 여러 일정이 있는 날이면, 아내 회사 앞으로 갔다. 아내가 야근을 하면 회사 앞에서 밥을 먹었고, 야근이 없다면 퇴근하면서 지하철 역 부근에서 식사했다. 기분 좋은 날이거나, 우리가 지키는 기념 주간이 있는 날이면 좋은 식당에도 갔다. 어느덧 엥겔지수가 엄청 높은 2인 가구가 되어 있었다. 

외식이 부담스러운 아내와 충돌 없이 외식하는 기간은 여행하는 기간뿐이다. 


오빠, 우리 집에서 밥 해 먹으면 안 될까?


어느덧 식사 문제는 우리 부부싸움의 주요 원인으로 자리 잡았다. 재정 지출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아내는 외식 그 자체를 힘들어했다. 결혼 전, 아내는 집을 나가서 살았던 적이 거의 없었다. 집에서 살면서 ‘엄마가 차려 준 식탁’을 만끽했다. 집밥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내는 사치로 느낀다. 거기에 가정이 있다면, 가족이 모여 집밥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잦은 외식이 아내의 가치문제를 건드렸던 것이다. 


내 생각은 달랐다. 맞벌이를 하던 어머니 때문이다. 어머니는 늦은 시각까지 일하고 귀가했다. 어머니가 차려 주는 식탁은 없었지만, 새벽에 차려둔 찌개나 반찬으로 알아서 밥을 먹었다.(물론, 먹고 싶은 건 주로 스스로 해먹기도 했다.) 대학생 때부터 자취를 하다 보니, 가족 식사는 일주일에 단 한 차례 일요일 오전에만 가능했다. 우리 가족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날에도 남동생과 나는 어머니를 도와 밥상을 차렸다. 음식 준비와 설거지도 나눠했다. 어머니가 두 아들과 남편을 오랜 시간 그렇게 교육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항상 강조했다. 결혼하면 아들들이 함께해야 하니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두 가족 문화는 결혼 후에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아내 부모님과 식사를 하면 아내 어머니께서는 항상 집밥을 차려 주셨다. 내 부모님과 식사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외식을 했다. 아내 부모님은 정성을 담은 밥상을 중요하게 여겼고, 내 부모님은 모이는 사람 누구도 힘들지 않은 밥상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 두 가정에서 자란 우리 부부의 다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내 어머니가 정성스레 밥상을 준비할 때면 늘 도우려고 한다. 어머니는 부담스럽게 여기시지만. 
식사 준비와 관련한 내 인건비를 생각해 줘.


외식과 관련한 우리 싸움은 늘 이 말로 끝난다. 나는 “식사 메뉴를 고민하고, 장을 보고, 요리하는 모든 시간에 내 인건비를 넣는다면 과연 어떨까”라고 묻는다. 아내는 물로, 주로 가사를 전담하는 지인들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처음에는 어이없어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질문이 이들에게도 묘한 의심을 남긴다고 한다. 내 인건비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사와 관련한 인건비는 과연 인정받고 있는가. 


최근 아내가 퇴사했다. 아내도 이제 프리랜서로, 자기 직업을 만드는 중이다. 중요한 건 아내도 가사 일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비건 라이프를 시작하면서 스스로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 관심이 생겼다고도 한다. 이 과정을 직접 경험하면서 아내는 가사 일과 관련한 ‘인건비’에 100% 동감한다. 물론 여러 이유로 외식은 여전히 꺼리고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제는 한결 자유롭다며, 이런 이야기를 한다. 


“당연하게 여겨서 눈에서 지운 노동이 얼마나 많을까. 엄마하고 밥 먹을 때도 맛있는 거 사 먹자고 해야겠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좋은 음식을 함께 먹으면서 그동안 엄마에게 고맙고 미안했다고 전하고 싶어.” 
“그래, 좋은 생각이야. 그런데, 그동안 수고한 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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