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유히유영 Jul 13. 2019

아내가 '비건'으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비건 페스타에서 독일 통일까지 생각하다 by  유자까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얼굴이 구겨졌다. ‘내 이야기는 왜 듣지 않고, 혼자 결정하지?’ 그래서 아내에게 물었다. 꼭 그렇게 해야겠느냐고. 그렇게 말싸움이 시작됐다. 아내가 ‘비건’을 선언한 밤의 일이다.


성서에서 자주 인용되는 문구가 떠올랐다. ‘그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도적이 든 밤 같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시각에 아내는 “비건으로 살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채식과 관련한 이야기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내는 2016년, 뉴욕시에서 1년 정도 거주하던 시절 비건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고민을 시작했다. 물론, 2016년부터 2019년 6월 마지막 주 수요일 이전까지는 가끔 내게 묻는 정도였다. 채식으로 살아보면 어떻겠느냐고. 이번에는 묻지 않았다. 결정했다.


한 팟캐스트 채널에 나온 비건을 지향하는 인물의 인터뷰를 듣고 결정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 충동적인 결정이라는 느낌은 받았다. 물론 3년가량 고민했으니, 맥락없는 결정은 아니었다. 아내가 왜 비건을 고민하는지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다. 바로, 우리 부부가 모시고 사는 두 반려묘가 원인이다. 


반려묘와 지내면서 아내는 많이 변했다. 첫 고양이가 우리와 함께 살기 전, 아내는 동물이 무섭다고 했다. 익숙하지 않은 존재, 미지의 생명체, 공포영화에서 사용된 무서운 이미지 등이 아내 머릿속 고양이였다. 그러다 생후 11개월 정도 지난 첫 반려묘를 맞이했다. 개냥이였고, 아내는 그와 금세 사랑에 빠졌다. 몇 개월 차이로 맞은 둘째는 조금 사나웠지만, 역시 빠르게 사랑하게 됐다.


두 반려묘와 살면서 아내는, 대다수 동물들이 존중받지 못한 상태로 살고 죽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2016년 공장식 축산과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경악했다. 이후 동물권을 생각했지만, 단백질 섭취와 고기 좋아하는 남편 때문에 비건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러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건을 지향하는 어떤 이의 인터뷰를 듣고, 바로 그 자리에서 결정한 것이다.


고기를 좋아하는 나와

죽음과 고통을 싫어하는 나의

인지부조화?


맥락은 이해했지만, 아내 결정을 존중하기 쉽지 않았다. 아니, 존중할 수 없었다. 나를 존중하지 않는 처사라고 생각했다. 나는 고기를 끊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 스스로 그렇게 여겼다. 내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트라우마 같은 사건이 내 머리에 남았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 일이다. 시골 이모댁으로 외가댁 식구 대부분이 여름휴가를 떠났다. 아주 즐겁게 3일 낮과 밤을 지냈다. 이모집에서 멀지 않은 무척 깨끗한 냇가에 자리를 잡았다. 텐트도 치고, 밥도 해먹었다. 마지막 밤은 지금도 생생하다. 갑자기 내린 폭우에 물이 불어, 고립되기 직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죽다 살았지만, 어렸던 나는 그 기억도 즐거웠다.


정작, 나를 평생 괴롭히는 경험은 마지막 날 점심에 일어났다. 서울로 올라가는 우리를 위해 이모부가 키우던 닭을 잡아 백숙을 해주겠다고 말씀했다. 백숙을 좋아했기에 무척 기뻤다. 문제는 닭을 잡는 순간이었다. 나는 크게 울부짖으며 닭을 죽이지 말라고 달려들었다. 결국 나 때문에 모든 가족이 한 시간이나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했다.


나는 닭이 죽는 게 싫었다. 나 때문에 누군가 희생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으로 생명을 지키려 했다. 엄마와 이모들이 를 달랬다.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했다.


점심 메뉴로 백숙이 나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닭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비참한 심정으로 그 닭을 먹었다. 나는 형제들과 부모님, 이모 부부와 외삼촌 부부에게 웃음거리가 됐다. 다들 비웃듯, “그렇게 죽이지 말라고 하면서 맛있게 먹네”라고 놀렸다. 그 순간, 나는 스스로 그런 존재라고 받아들였다. 죽음을 반대하면서도 죽음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내가 기억하는 첫 인지부조화는 이렇게 조화를 이루며 30여 년간 나를 끌고 왔다.

부부는 비건 라이프를 독일 통일처럼 갑자기 맞이하게 될까.


비건은 독일 통일처럼


아내를 위해 비건 페스타에 참여했다. 나는 아직 비건으로 살지 않지만 아내와 함께 살기 위해 알아야 할 새로운 지식이 많이 필요했다. 우리 집 요리는 대부분 내가 한다. 비건으로(누군가의 표현처럼 한국에서 완벽한 비건은 힘드니 비건을 지향하며) 살기로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 도착하니 마음이 많이 풀렸다. 날이 좋기도 했고, 내 인지부조화도 왠지 끝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그날 아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자기 결정을 존중할게. 나도 최선을 다해 동참해 볼 테니, 완전히 동참하지 못하는 상황의 나를 조금 이해해줘. 그리고 최대한 따라갈게. 혼자 너무 멀리 가지 말아줘.”


아내는 고맙다고 했다.


맑은 하늘 아래,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보며 갑자기 독일 통일이 떠올랐다. 평생, 통일을 입으로 이야기해 왔을 것이다. 정치인들은 여러 상황과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며, 의견을 좁혀 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적대하던 상황을 마치고 싶은 심정이라고 국민을 설득하기도 했다. 그런데 통일은 그런 정치적 과정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독일 통일은 한 정치인의 말실수로 이뤄졌다. 지금 이 순간부터 서독으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고 잘못 이야기한 동독 정치인의 말이 통일을 부추겼다. 어쩌면 아내가 갑자기 비건으로 살겠다고 한 선언이 우리를 이끌지 모른다. 정치적으로 준비는 되어 있다. 오랜 토론도 해왔다. 통일 비용처럼 비건으로 살아야 하는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그렇게 살 충분한 필요가 있다면, 꼭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건페스타 방문 영상: https://youtu.be/ezO39rKAGIg

비건 페스타에서의 경험은 저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답니다.
이전 04화 '면 생리대' 빨래하는 남편으로 거듭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