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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히유영 Mar 31. 2019

'면 생리대' 빨래하는 남편으로 거듭나다

월경하는 아내에게 'OO'가 보였다 by 유자까(에세이)

아내와 나는 결혼 7년 차, 초보를 벗어 가는 부부다. 우리는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 방식이 있다. 우리만의 날이 있는 한 주를 기념일 주간으로 지킨다. 가령 생일이 있으면 생일 주간, 연애 시작일이면 연애 시작 주간, 결혼기념일이 있으면 결혼 주간, 이런 식이다.


기념일 주간에는 서로가 힘들어하는 일을 면제해 준다. 가사에서 제외하고, 무언가 실수해도 잔소리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 주의 마지막 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고마웠던 일과 미안했던 일을 고백한다.


3월에는 연애 시작 주간이 있었다. 올해 연애 시작 주간은 내게 의미 깊은 기간이었다. 여성의 월경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몰라 미안하다고 사과한 것이다. 주간 마지막 날, 함께 곱창을 구워 먹으며 아내에게 나는 이렇게 고해했다.


앞으로 내가 '면 생리대'를 빨도록 할게. 1년 전, 내가 이걸 왜 빨아야 하냐고 큰소리 낸 것도 진심으로 사과할게.
갑자기 어쩐 일이야?
내가 경솔했어. 이걸 왜 빨아야 하냐고 소리치고 많이 반성했어. 네가 힘들어하는 일에 동참할 유일한 방법을 모른 척한 것 같아.


아내는 생리통이 심했다. 한 달에 5일 정도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을 한탄했다. 직장에 다녀오면 배를 따뜻하게 해 주려고 어루만져 주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 생리통이 나아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면 생리대를 사용하면서 생리통이 급격히 줄었다. 일상생활도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다. 1년 정도 사용하면서 큰 효과를 본 아내는 마법이라고 지금도 감탄한다.(일회용 생리대에 유해 물질이 많다는 최근 보도를 보며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면 생리대 빠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생리혈을 빼야 하고, 빨랫비누나 베이킹파우더로 빨아야 한다. 게다가 PD로 일하면서 터널증후군이 생긴 아내에게 손빨래는 무리였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내게 면 생리대를 빨아 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면 생리대를 사용하고 두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사생활이잖아. 스스로 해야지"라고 매몰차게 답했다. '아무리 부부라지만, 개인 일인데 이것마저 날 시키려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아내는 이렇게 답했다.


"생리가 얼마나 힘든데, 고통에 동참해 주면 안 될까?"


충격이 컸다. 나름 여성과 함께하려고 노력한다고 여겼다. 집안일은 나눠서, 아니 오히려 내가 더 많이 한다고 생각했다. 청소기는 아내가 돌리고, 나는 걸레질을 한다. 내가 요리하고, 아내는 설거지한다. 빨래는 주로 내 몫이었지만, 빨래를 개면서 원하는 TV 프로그램을 볼 수 있기에 상관하지 않았다. 장보기, 커피 내리기, 과일 깎기도 주로 내가 했다.


그런데 무언가 잘못되었다. 나는 이러한 일로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스스로 여성을 위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다른 남자와 다르고, 선한 일을 한다는 도덕적 우위에 서려고 했다. 고작 집안일 몇 번 더하는 것으로 말이다.


이 사건 후, 아내는 같은 부탁을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아내가 한 말은 내 머리에 박혔다. 1년이 지나도록 떠난 적이 없다. 생리혈을 빼려고 화장실에 둔 생리대를 보며 늘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렇게 생각하는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 남자구나.' 함께할 수 있는 일도 여성 개인의 고통으로 치부하는 사고가 다르지 않았다.


유튜브 '아내의 슬기로운 월경생활을 위해'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k86H5-VY-yc


(이하 내용은 개인 종교적 해석이 들어 있으니, 종교색을 싫어하시는 분은 아래 두 문단을 건너띄고 읽으셔도 됩니다.)


곧 고난주간을 맞는다. 이 시기, 아내는 다시 월경의 고통과 함께해야 한다.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하나님이 여기에도 임하신다. 이러한 아내를 보며, 여성이 다른 이의 고통에 민감한 건 월경 때문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한 달에 한 번 육신의 고통이 찾아온다.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고통은 그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십자가와 같다. 이웃이 아파할 때 함께 눈물 흘리며 아파할 힘이 여기서 오는 건 아닐까. 그런 의미로 아내에게서 예수를 본다.


기독교는 이웃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고통 속에 사는 이들을 돌아보라 가르친다. 그런데 바로 옆에 있는 여성이 겪는 고통에는 관심이 없다. 남성 목사가 "하와의 범죄로 생긴 벌이 월경"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사회라고 다를까. 1953년 전쟁 중에 제정된 생리 휴가 제도를 두고도 대다수 남성이 역차별이라고 말할 정도다. 기업들이 유급 휴가를 줄일 방안으로 생리 휴가를 무급으로 전환했을 때, 남성들은 뒤돌아 웃었다. 생리 휴가를 내면, 그날 노동의 대가를 포기해야 한다. 결국 여성은 기업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 희생을 강요받는다.


남성성을 대표하는 듯한 교회도 여성의 눈으로 세상과 고통을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교회의 시각이 변하면 사회와 남성의 시선도 바뀔 가능성이 그나마 조금 높아질 것이다. 그제야 우리 사회 여성 문제도 진전될 수 있을지 모른다. "나의 고통에 동참해 주면 안 될까"라고 했던 아내의 요청은 시대의 요청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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