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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히유영 Mar 01. 2019

어느 부부의 일상 누아르

아주 마이크로한 일상 권력 투쟁기 by 유자까


숨 막히는 시간이 지난다. 왠지 모를 긴장감마저 감돈다. 무거운 음악이 필요하다. 우리의 상황을 누아르로 극대화할 음악 말이다. 클래식으로 브금을 선정했다. 급한 대로 음악 앱이 보여주는 클래식 인기 순위 100을 선택해 틀었다. 역시 음악만큼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표현해 주는 도구도 없다. 우리 부부의 누아르는 그렇게 시작됐다.


음악이 나오자 바로, 아내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음악은 왜 튼 거야?"
"우리 상황을 누아르로 만들어 주잖아."
"지금 우리 상황이 누아르는 아니지."
"아냐, 누아르는 어두운 분위기와 어두운(검은) 화면, 긴장감이 화면을 채우면 돼. 그게 장르 특성이니까. 형광등도 끄면 완벽할 테니 기대해."


둘 다 실소했지만, 상황은 진짜 누아르로 이어졌다. 어두운 분위기 속, 탁자에 놓인 작은 스탠드가 우리를 비춘다. 주먹이나 권총으로 싸우지 않지만, 서로를 향한 눈빛에는 원망과 애정, 미움이 교차한다. 처절한 폭력도 빠지지 않는다. 우리 부부 전공인 '아가리 파이팅'으로 말이다. 욕설이 난무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저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낮아지길 반복할 따름이다. 이후 한숨과 침묵이 뒤섞인 분위기가 연출되면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른다. 오늘은 이런 상황이 60여 분째 이어지고 있다.


부부 누아르는 주도권 투쟁과 같다. 성향 차이와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두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관계를 이끌고 싶은 것이다. 대다수 부부가 그렇듯, 우리는 정말 다르다. 가끔 둘이 어떻게 같이 살고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많은 부분 중, 오늘 누아르를 찍게 된 성향 차이 하나만 소개하겠다.


아내는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이 점이 무척 매력적이다. 자신이 가진 모든 힘과 열정, 시간을 쏟아서 만족할 결과물을 만들어야 힘이 난다. 이를 위해 주변 모든 에너지를 동원한다. 그리고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받는다. 신기하게도 이런 면이 지금 일터와도 잘 맞는다. 비슷한 이들이 모여서 그렇다. 참고로 아내는 PD, 나는 방송작가로 일한다.


이에 비해 나는 조금 게으르다. 편이라고 썼다가 지웠다. 진심 게으르다. 최근에는 마음의 병도 생겨 뭔가 그렇게 불태울 연료가 더욱 부족해졌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다져온 게으름이 길러준 능력이 있다. 막판까지 미루다 만난 위기를 건너는 방법에 능하다. 뛰어난 집중력과 기억력, 우연히 만난 자료들을 묶어내 하나로 만드는 힘을 길러왔다. 아쉬운 사안이 있다면,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내는 게으른 내 모습에 늘 불만을 토로한다. 결혼 생활 7년 동안 불만의 강을 넘길 수 있었던 건, 아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기발한 아이디어와 기획이 내게서 나왔던 탓이 크다. 방송국에서 먹힐 아이디어와 신선한 기획들 말이다. 나름 호평을 받았다. 뉴욕에서 한인 신문 기자로 지낼 때도 그랬다. 많은 독자가 칭찬할 기사를 자주 썼기에 그럭저럭 넘길 수 있었다.


문제는, 한국에 돌아와 내가 프리랜서로 지내면서 시작됐다. 알아서 시간 관리를 해야 하는 상황인데, 아내가 보기에 더는 참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애정을 담아 내가 잘되기 위해 고쳐야 할 부분을 연달아 지적했다. 나는 섭섭해하기 시작했다. “한번 말하고 넘어가면 될 일을 종일 이야기한다”고 불평했다. 같이 있으면 뻔히 힘들 텐데 굳이 나와 같이 있으려 하는 모습에도 불만이 많았다. 물론, 집은 우리 공동 작업실이다. 하지만 책상을 옆에 배치하고, 그곳에 앉히려 하는 게 싫었다. “감시하고 싶으냐”고 따지기도 했다. 


결국 만족할 접점을 찾지 못한 오늘 우리 부부의 관계 장르는 누아르가 됐다. 아내는, 게으름에서 나오는 내 기획과 생각은 좋아하지만, 세월아 네월아 하는 듯한 태도에 만족할 수 없다. 나는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하는 결과를 수년간 보여줬는데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아내 마음을 받아들이기 싫다. 부부의 주도권 투쟁이 우리를 누아르로 이끈 것이다. 


오늘은 반복된 결말에서 벗어났다. 그동안 없었던 결론, 나를 바꿔 보기로 한 것이다. 아내 말처럼, 많은 사람이 모든 힘을 불태우며 살아간다. 그렇게 살기 싫어도 어쩔 수 없다. 아니면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 물론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렇게 살아보기로 했다. 그래야 우리 누아르 이야기가 새 국면을 맞을 테니 말이다. 매일 반복되는 싸움만 보여주는 이야기를 누가 보겠나. 스토리가 빈약한 자극적 영상은 포르노, 그것도 3류 포르노에서나 통할 전개 방식이다. 


좋은 이야기는 새로운 긴장감 속에서 관계가 역동하며 흘러간다. 긴장감이 관계를 이끌어 주는 중요한 포인트란 말이다.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 관계는 힘이 잃는다. 결국 좋은 관계에는 새로운 긴장감으로 이어지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오늘 내가 내린 결정은 다음 이야기로 이어지는 복선이 되거나, 어떠한 결론으로 나아가 이야기를 마치는 과정이 된다. 좋은 결론이든 나쁜 결론이든.


우리는 다시, 새로운 긴장감을 써내려 간다. 이 긴장감은 우리를 다른 장르로 달려가게 한다. 어떤 날은 로드무비, 어떤 날은 격정 멜로, 어떤 날은 코미디, 어떤 날은 누아르, 어떤 날은 휴먼 다큐멘터리, 어떤 날은 스릴러. 그렇게 매일 관계 속에서, 주어진 장르의 주인공으로 살게 한다. 이 역동성이 우리를 좋은 이야기로 이끌고, 재미있는 관계로 만든다. 너무 과격하면 하드고어 폭력물로 변할지 모르니 조심해야겠지만. 그래도 우리 스스로 해석할 수 있을 정도의 장르물을 계속 만들면 좋겠다. 


시청률, 관객 동원 그런 건 상관없다. 이번 내 결정이 어떤 이야기로 우리를 이끌지도 모르겠다. 클라이맥스에서 맞이한 결말이 허무하지 않기를 바란다. 삼류 스토리가 되지 않게 그 역할을 최대한 잘 소화하고 싶다. 그리고 결론에 이르러 주인공이 살아남고, 적대하던 사람이 파멸하는 모습을 볼 것이다.(응?!) 아니, 부부 사이에 있는 작은 권력, 주도권 다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부부 사이에서도 동등한, 아니 동등해지기 위한 노력을 이어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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