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유유히유영, 시작하기까지의 이야기 by 유자까
우연이 자기 길을 찾아가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많은 우연이 모여 필연이 되는 과정도 존재하지요. 우리가 하는 일, 그러니까 영상 제작을 포함한 모든 콘텐츠 제작도 그랬습니다. 우연들이 모여서 우리 일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유유히유영이 외주 제작사로 첫발을 내딛도록 한 영상 작업은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재미있었던 첫 작업을 한 지 2년이 흘렀네요. 2주년을 맞아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 그동안 좋았던 점, 유유히유영이라는 이름의 의미 등을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그럼, 히위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평소 같으면 그냥 넘겼을 텐데, 그날은 왠지 지나치지 않고 받았다. 2015년 10월, 맑은 일요일의 일이었다.
“여보세요.”
“유 기자, 전화지요? 반가워요. 박희만(가명)이에요.”
“아, 선배,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리네요.”
선배 기자인 박희만은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지랄’맞았던 이전 직장 대표에게 글로 인정받은 손에 꼽히는 선배로 잘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2005년, 대표와 미국으로 건너가 지사를 만들 당시에 말이다. 내가 직장 생활할 때, 대표는 술을 마시면서 가끔 미국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박 선배는 대단한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자기가 갈구는 통에 글이 늘었다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아는 선배였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통화를 하다니. 전설에 나오는 도깨비를 대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전화한 목적에도 놀라웠다.
“유 기자, 뉴욕에서 기자로 일해 보고 싶지 않아요?”
전신이 떨려왔다. 소름도 돋았다. 샤워하고 나오는 아내에게 바로 이야기했다. 아내도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퇴사를 생각하고 있었으니, 나보다 더 많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아내에게 있어 ‘회사의 목적과 자신의 목적이 더는 맞지 않는다’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비영리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고민이었다. 하여튼 아내도 직장 퇴사를 고민하던 시기였기에, 솔깃한 제안이긴 했다.
게다가 우리는 함께 일하는 사이였다. 아내는 PD였고, 내 직업은 방송작가였다. 거기다 내가 기자에서 방송작가로 전업한 지 2년 조금 넘긴 시점이었다. 이 제안으로 다시 기자로 일할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려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일단 선배와 약속을 잡고, 미국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며칠 후 만난 박 선배는, 전설 속 도깨비 같은 인물은 아니었다. 털털한 성격이었고, 썰렁한 농담을 잘 던지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기자 일을 그만두고, 자신이 직접 설립한 단체의 대표로 일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미국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하다 비자 문제가 꼬이는 바람에 쫓겨났어요. 그래도 내가 가야할 방향을 찾았으니 정말 다행이죠.”
우리가 솔깃할 이야기였다. 거기에 박 선배가 들려준 미국에서 경험들도 흥미로웠다. 몇 달 전, 뉴욕 출장을 다녀온 아내는 그 이야기에 자신을 대입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직장도 그만둘 명분이 되고, 돈을 벌면서 뉴욕에서 지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나이가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했다. 39살을 맞이하는 해인데, ‘미국에서 실패하면 그 충격을 견딜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날 괴롭혔다. 앞으로의 인생도 고민이 ‘매우 많이’ 됐다.
우리는 선배에게 연락하겠다고 인사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우리 싸움이 시작됐다. 뉴욕으로 가고 싶은 아내와 한국에 남으려는 나의 대립은 3주에 걸쳐 이어졌다. 당연히 이 기간 내내 아내는 가겠다는 마음을 접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가 이길 싸움이 아니었다. 결국 뉴욕으로 가기로 했고, 선배에게 연락했다. 이후, 약 2달에 걸쳐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했다. 전셋집·자동차·자전거 등 팔 물건은 팔고, 세탁기·냉장고 등 맡겨야 하는 물건은 가족에게 맡겼다. 그리고 적어도 3년, 아무리 힘들어도 버텨보기로 하고 우리는 뉴욕으로 향했다.
뉴욕에서 가지고 온 자신감
그렇게 떠났지만, 우리는 1년 3개월 만에 돌아왔다. 해결되지 않는 비자, 높은 물가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급여, 대표와의 갈등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미국에서 많은 한인이 겪는 문제라더니, 역시 우리 부부에게도 어려움이 닥쳤다.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아, 어렵게 귀국을 결정했다.
미국에서 지낸 기간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그 시간동안 우리는 꽤 많이 변했다. 먼저, 아내가 1인 제작자로서 실력이 부쩍 늘었다. 그동안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여러 스텝과 협업하는 과정에 익숙했다면, 미국에서는 영상을 혼자 만들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1년간 혼자 지지고 볶고 하다 보니, 홀로 영상 제작하는 일이 익숙해졌다. 그리고 ‘평생을 직장에 기대어 살아야 한다’에서, ‘우리 일을 직접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뉴욕에서도 꿋꿋이 일하며 살아남았다는 자부심이 생겼다. 이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먹고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창업으로 우리 꿈,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한국으로 돌아와 창업을 시작하리라 생각했는데, 우리 마음대로 흘러가는 인생이 있던가. 내가 전에 일했던, 한국 직장에서 다시 일할 기회가 찾아왔다. 의기양양하게 창업할 거라 생각했지만, 미국에서 먹고 사는데 돈을 많이 쓴 상태였다. 막상 한국에 오니 생계가 걱정됐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특히 아내는, 언론사에서 영상 파트를 개척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아내의 영상 작업이 완전히 자리 잡았다. 이제 혼자서도 영상을 잘 만들었다.
2년간 언론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실력을 키운 뒤, 우여곡절 끝에 퇴사를 했다. 회사 인간을 졸업하고 이제 정말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10여 년간 쉬지 않고 회사에서 일했으니 당분간 충전하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다음 단계를 꿈꾸며, 여러 가지를 논의했다. 그러던 중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저장해 둔 번호였다. 박 선배였다.
“안녕하세요. 선배.”
“유 기자, 잘 지냈어요? 우리 단체 회장께서 두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하는데, 영상은 계속 만들고 있지요? 시간 되면 얼굴 보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