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유히유영 Apr 23. 2020

회사의 실체는 무엇일까

소설 <9번의 일> 리뷰 by 믹서

(*스포일러 있으니 주의하셔욤)

소설 <9번의 일>의 화자는 고등학생 아들을 둔 중년 남성이다. 이름은 나오지 않고 ‘그’라고 지칭된다. 통신 회사에서 26년간 일했다. ‘그’의 시각을 좇아 일과 삶의 의미를 말하는 소설 <9번의 일>.


<9번의 일>이라는 제목의 의미는 소설이 끝날 즈음 나온다. '아홉 종류의 일인가?', '아홉 번 이직을 했다는 건가?' 하고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9번은, 노동자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어떤 사람은 3번, 소설 속 남자는 9번.


누가 무슨 일을 하던, 회사 입장에서는 큰 상관이 없다는 뜻이기도 한 것 같다. 30년 가까이 통신 기술자로 살아온 남자에게 회사는 곧 자기 자신이었다. 회사가 퇴직을 종용할 때도, 회사가 개인을 학대할 때도, 남자는 회사에 끝까지 남는다. 자기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도 모르고, 오히려 자신을 더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걸 알면서도 어디까지 자신이 버틸 수 있는지 시험해보겠다는 의지도 밝히면서.


자신이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지, 그래서 마침내 닿게 되는 곳이 어디인지,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거기까지 이르러야만 이 기이한 집착과 이상한 오기를 모두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사의 논리대로 돌아가는 세상은,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 노동자는 인간관계, 가족관계, 경제관계 등 모든 분야에서 회사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으로 길들여진다. 그리고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진다.


회사는 무엇인가. 일은 무엇인가. 사람은 대체 무엇으로 사는 건가. 별 생각이 다 들게 하는 소설이었다. 읽는 내내 너무 우울했다. 근데 너무 현실적이라 숨도 쉬지 못하고 읽었다.


30대 여성인 김혜진 작가가 대체 이 얘기를 어떻게 쓴 건지 신기했다. 회사 인간으로 살아가는 중년 남성의 심리를 어찌 그리 잘 표현했을까. 취재의 힘이지 않을까 예상하지만, 디테일한 상황과 심리 묘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 속 남자는 나보다 한 열 네댓 살 정도 많다. 나와 정말 거리가 먼 종류의 사람이다. 차라리 아빠 세대면 아빠를 생각하면서 상상할 수 있었을 텐데... 생소한 4,50대 중년 남성 캐릭터가 화자가 되어 이끌어 가는 내용이었기에 너무 우울하고 힘들었던 것 같다. 읽는 내내 한숨을 쉬었다. 남자의 말과 행동, 선택들이 잘 이해가 안 됐다. “왜? 왜? 왜 회사를 안 나가지?” 이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을 읽어 나갈수록 빨려 들어갔다. 회사원이었을 때 내 모습이 자꾸 겹쳐 보이는 거다. 나도 ‘그’처럼 회사가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었다. 회사 일은 곧 내 일이기도 했으니까 과도한 노동을 해도 억울하지 않았다. 일은 내 삶의 전부였고 보람이었으니까. 결국 소설 속 남자는 곧 나였다.


접이식 사다리를 한쪽 어깨에 멘 채 고개를 쳐들어 선을 살피고, 손에 익은 공구를 쥐고 장비를 다루는 동안 등줄기로 더운 땀이 흘러내렸다. 근육과 관절이 움직이고 낯익은 통증들이 살아나는 게 느껴졌다. 그건 몸이 기억하는 자신의 일이었다.


이 부분 읽을 땐 어이가 없었는데, 생각해 보니 나랑 똑같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몸을 혹사시킬 때까지 일을 해야 '오늘 일 좀 했구나' 하며 만족감이 드는 나. 회사를 떠나 자유롭게 일하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내 몸이 기억하는 노동이 있는 게 확실하다. 회사가 날 가르쳤는지, 내가 날 그렇게 만든 건지, 어려서부터 학교와 가정에서 그런 사람으로 길러진 건지 그건 잘 모르겠다.


퇴사한지 벌써 9개월이 넘어 간다. 10년간 두 번 이직했고, 세 곳의 회사를 거치며 회사와 자아가 뒤섞여 내가 회사인지, 회사가 나인지 몰랐던 때를 보냈다. 30대를 바쳤던 회사 일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회사 인간에서 벗어난 지금도 여전히 나와 회사의 구분점은 묘연하고, 내 감정은 헛갈린다.


오랫동안 그에게 회사는 시간을 나눠가지고 추억과 기억을 공유한 분명한 어떤 실체에 가까웠다. 그의 하루이자 일상이었고 삶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친구이자 동료였고 가족이었으며 또 다른 자신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소설 속 남자는 실체 없는 회사를 실체 있는 회사처럼 느끼고 살았다. 그의 인생 전체를 실컷 주무른 회사는 결국 남자를 내쳤다. 회사에서 그를 내보내는 역할을 맡은 상사들은 하나같이 다 “나도 위에서 시켜서 이러는 거다”라고 말했다. 대체 그 '위'의 실체는 무엇일까.


가까운 사람들 틈에서 너무나 쉽게 갈등을 만들고, 무엇이 미움과 불만을 부풀리는지 아는 영악하고 지능적인 회사의 실체를 비로소 목격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에 나도 회사라고 하나 세웠다. 사업자등록증을 낸 것뿐이지만, ‘회사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고민이 깊다. 아직은 남편과 나 둘뿐이라, 실감이 잘 나진 않는다. 회사 곧 우리 둘. 회사의 실체가 명확한 지금 우리는 자유롭다.


회사를 나와 또 다른 회사를 만들어 나가는 시기에 <9번의 일>을 읽으며 생각이 많아진다. 회사와 개인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회사에 쓸모가 있을 때까지, 딱 그때까지만 회사와 나는 한 몸이고, 그 이후에는 서로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원수가 되는 것이 현실인데 말이다.


먼 훗날, 우리 회사가 실체가 안 보일 정도로 커지면(과연?) 나도 9번의 일을 하는 직원을 보게 될까. 내가 회사를 세운 이상, 내가 회사의 가장 위가 될 텐데(아닐 수도?). 그 '위'라는 게 어떤 실체가 될까. 무섭고, 궁금하다.


소설 속 남자는, 회사가 시키는 대로 통신탑을 열 개 넘게 세웠다. 주민들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그는 회사의 대변인이 되어 그들을 막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 가서, 자신이 한 일의 부조리함을 깨닫고 탑을 무너뜨린다. 너무 갑작스러운 결말이었지만, 속은 시원했다. '이제야 좀 소설 같네'라는 생각이 들어서 일까.


그가 탑을 무너뜨리기 전까지는 이 책이 소설인지 르포인지 구분이 잘 안 갔다. 리얼리즘 영화를 보는 느낌까지 들 정도로 잔혹한 현실을 실감나게 그렸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은 매우 잔혹한 게 팩트) 실제로 통신탑을 무너뜨릴 통신 기술 노동자가 세상에 있을리 만무하다. 현실에서 자신의 생각을 실행으로 옮기기가 어디 그리 쉽던가. 아, 정말 씁쓸하다. 나도 그러질 못했으니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모가 만든 세상을 깨고 진짜 자아를 찾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