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유히유영 Apr 13. 2021

아버지의 두줄 일기가 가져온 파장

유퀴즈 <시간의 마술사들> 편을 보며 by 믹서

식사 시간에 TV를 보는 걸 좋아한다. 요즘엔 ‘유퀴즈’ 재방송이 많이 나와서 자주 본다. 오늘도 점심을 먹으면서 유퀴즈를 시청했다. 한국 최초로 자율주행 자동차를 만든 박사님 이야기를 보며 감탄했고, 한국 영화의 수준을 높인 CG전문가가 CG 작업을 설명하는데 그 세계도 얼마나 힘들까 생각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이 아직 살만하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하는 프로그램이다.


두 인물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식사가 끝났고, 나는 설거지를 하러 갔다. 세 번째로 4기 암환자를 주로 치료하고 돌보는 의사가 나왔는데 남편 Y는 그 부분까지 시청을 했다. 설거지가 끝나고 Y에게 그 스토리에 대해 물었다.


“그 의사가 무슨 얘기 했어?”
“대화가 좋더라”
“뭐라고 했는데? 기억에 남는 얘기 좀 들려줘 봐”
“한 아들이 돌아가신 아버지 일기장을 가지고 의사를 찾아왔는데...”


한 3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Y는 말을 이어갔다. 암 투병 중인 아버지에게 그 의사가 일기 쓰기를 권했는데, 하루에 두 줄씩만 써 보라고 했다는 거다.


아들에게 미안하다.
그런데 그 말을 할 수가 없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두줄 일기를 듣는 순간 눈앞이 흐려졌다. Y의 눈도 빨개졌다. Y는 눈물이 거의 없는 사람이다. 이번엔 눈물을 삼키는 것 같아 보였지만, 모른 체하고 나는 “너무 슬프다, 너무 슬프네”라는 말을 반복했다. 보통 때라면 그 주제로 한참 이야기했을 테지만, 오늘은 왠지 더는 말을 붙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Y는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다. 아버지로 인한 상처가 많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 영향 아래에 짓눌린 경험이 있다. 아버님은 그것에 대해 잘 모르시고, Y도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아서 Y의 상처에 대한 대화가 이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지금은 겉으로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Y의 감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Y에 비해 나는 아빠와 돈독한 관계를 갖고 있다. 전화도 자주 하고, 가끔 소주도 같이 마신다. 엄마 아빠가 갈등을 겪을 때, Y는 내가 지나치게 아빠 편을 든다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사소한 대화들 속에서 Y가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는 감정을 읽게 되는데, 가끔은 안타까운 마음에 몇 마디 한다.


“나중에 아버님 돌아가시면 얼마나 후회를 하려고 그래”
“글쎄, 눈물이라도 나오려나... 나도 모르겠다”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늘 결론 없이 한숨으로 끝나곤 했다. 오늘은 둘 다 붉어진 눈시울을 서로 외면한 채 각자의 자리로 갔다.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말할 수 없었다는 아버지의 두줄 일기를 곱씹었다. Y도 그랬을까. 그러길 바라지만, 금세 잊어버리고 다른 것에 집중할 수도 있다. 언제쯤 Y와 아버님의 앙금이 풀어지려나. 아버님도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계실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에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가 어지럼증이 심해서 걱정이 되니 엄마에게 전화 좀 해 보라고 했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엄마랑 대화하기 힘들다며 불만을 토로하던 아빠의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살짝 웃음이 났다. 하여튼 알았다고 했다. 빗길 운전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Y는 이런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부녀지간을 늘 신기해하며 웃는데, 오늘은 아무 말이 없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지만 오늘까지는 묻지 않았다. 내일은 이야기해볼 수 있으려나. 유퀴즈에 출연한 한 의사의 에피소드가 큰 숙제를 남긴 하루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사위의 처가 견문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