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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Apr 28. 2016

첫 번째 린넨 가방의 탄생

#상하이 세탁소와 환상의 콜라보

바로 오늘이다. 상하이 원단시장에서 떼 온 린넨이 가방으로 재 탄생하는 날.

세탁소 아줌마는 가방을 처음 만드는데, 네모난 것을 박음질하는 게 뭐 그리 힘들겠냐며 해보겠다고 하셨다.

단돈 5천원에 거래가 성사됐다. 공장에서는 5만원 넘게 주고 만들었으니, 십분의 일 가격이었다.

퀄리티는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세탁소도 나도 가방 비기너이니 시행착오가 필요하겠지.

심지어 세탁소는 하루면 됐다. 어제 맡기고 오늘 찾으러 가는 시스템. 매우 맘에 든다.


아줌마의 문자를 받고 세탁소로 달려갔다. 차가 막히는 시간이라 지하철을 타고, 갈아타고, 걷고, 가는 시간이 조금 긴장되고 설렜다. 내 인생 첫번째 셀프 제작 가방이 탄생하는 순간이니까.


아줌마는 조금 심드렁했다.

니가 원하는 게 이런 거 맞니? 린넨은 너무 얇지 않니? 근데 너는 왜 가방을 직접 만드니?

네, 제가 원한 정사각형 맞네요. 그냥 린넨 천이 이뻐서 샀어요. 이런 걸 파는 데는 모르니까, 만들 수밖에요.


가방을 들고 약속 장소로 가야 했다.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비까지 내렸다. 지하철로 가기엔 매우 복잡한 노선이었다. 그래서 걸었다. 새 가방을 품고 있어서 그런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30분 정도를 걷기까지는. 하지만 택시는 계속 잡히지 않았고, 나는 그저 걸어야 했다. 그렇게 50분을 걸었다. 생각해보니 오늘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너무 허기가 져서 헛것이 보일쯤 되자 약속 장소가 눈앞에 나타났다.

안개가 낀 날이면 K11 건물은 늘 '고담시티' 분위기를 낸다. 저 멀리서 누군가 배트맨 마크를 하늘에 쏘아 올리면 배트맨이 당장이라도 망토를 휘날리며  나타날 것 같은.

지나친 배고픔으로 정신이 혼미해져 이런 환각 상태가 되었다.

나는 고기와 면을 싫어한다. 그런데 스파게티 볼로네즈를 시켰다. 포만감을 줄 수 있는 시너지가 필요했다. 친구가 도착하기 전애 싹 다 해치웠다.

배가 부르고 나자 새 가방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분이 두 배 좋아졌다. 걸어도 보고 매 보기도 했다. 어깨끈을 길게 만들어서 더 좋았다.

화병에 꽂아둔 꽃과 색깔이 잘 어울려서 '어디서 많이 본 컷'도 연출해 봤다. 꽃을 넣고 다닐 건 아니지만 그런 느낌으로 들고 다닐 테다.

수년전부터 서랍에서 뒹굴고 있는 장식도 걸어봤다. 대학생 느낌이 나서, 이런 건 나는 '안 걸고' 다니는 걸로.

다른 백에 매어두었던 끈을 풀어서 새 가방에 달아봤다. 이렇게 데코레이션을 하고 외출했다. 갑자기 없던 우아함이 2% 정도 생긴 기분이었다.


외출 장소는 다시 그 세탁소.

어제 카키 백을 찾으며 새로 제작 의뢰를 했던 그레이 린넨가방을 찾고, 오늘 그레이 린넨가방을 찾으면서, 지난번에 함께 사 왔던 골드 린넨 천을 또 맡겼다. 내일이 되면 린넨 가방이 3개가 된다.

이걸로 봄 여름 가을을 날 것이다.


회사를 다니면서 어찌어찌 장만했던 명품백들은 한 번도 상하이의 거리로 나선적 없지만, 세탁소 아줌마에게 만원도 안 주고 만든 린넨 가방은 전부 상하이 시내를 활보할 예정이다. 품위유지 보다는 실용이 우선인 일상이다.


세탁소 아줌마는 가방 두 개를 만들더니 손에 좀 익었는지, 디테일이 조금 더 좋아졌다. 다른걸 또 맡겼더니, 이번엔 내가 손으로 그린 발로 그린 그림도 필요 없다 하셨다. 좀 재밌어하시는 눈치였다.

아줌마와 함께 나도,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더 나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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