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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May 03. 2016

내게는 마지막 '봄의 상하이'

Shanghai #72

분명 그럴 것이었다.

내일 떠나 6월 중순에나 돌아오게 되면, 그때 이곳엔 여름이 당도해 있을 테니까.

따뜻하고 온화했던 해가 앙칼지게 쏘아붙이며 왜 이리 늦었느냐 할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는 일들이 한국에 있고, 가야 할 곳이 있다.


사실 뿌염을 놓친 내 머리칼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기도 하다.

세렝게티에서 먹이를 쫓다 정신줄을 놓아버린 암사자의 갈기 같은 머리가 되었다.


일요일, 배고파 미친 암사자의 심정으로 햄버거집에 당도했다.

[Bistro Burger]

한때 상하이의 가장 맛있는 햄버거라 믿었던 곳이다.

좀 살고 나서야 이쯤 되는 햄버거집은 널려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맛난 햄버거가 많지만,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쉐이크'다. 특히 '몽키 비즈니스'. 땅콩 소스와 바나나의 완벽 조합으로, 마시는 순간 뇌가 아찔하다.

햄버거와 쉐이크를 동시에 먹는다면, 본능적으로 알게된다. 이건 만 칼로리야. 하지만 입을 뗄 수가 없잖아.

맛있으면 0칼로리 같은 되지도 않는 변명은 하고 싶지 않다. 걸어야지. 이렇게나 먹었으면 그거 많이 걷는 수밖에.  

지난번에 가보려다 실패한 카페 [Fumi]로 향했다. 우리가 가는 코스로는 늘 무단횡단을 하게 된다. 길이 좁고 한산해서 다행.
카페 안은 작다. 자리도 좁고 손님도 많다. 일요일이고 노동절이고, 게다가 좋은 커피 향이 활짝 열린 통유리 창으로 온 길가에 퍼져있으니까.
카페 Fumi에서 만든 커피 원두를 직접 만들어서 파는 모양이다. 갖춰놓은 장비들이 아마추어 같지는 않다.

 해가 쏟아지는 뻥 뚫린 창가 자리에 앉았는데,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한국 드라마와 가수를 좋아하는 상하이 사람이었다. 붙임성이 좋아서 함께 온 사람들처럼 대화를 좀 나눴다. 안면을 텄다는 구실로 우리는 '휴대폰으로 수도세를 내는 방법'을 물어보았다. 한국 드라마와 가수 얘기를 하다가 그는 일을 하러 간다고 일어섰다. 이곳 푸미 카페가 그의 직장이었다. 다음에 오면 맛있는 커피를 주겠다고 했다. 이 곳의 커피는 이미 아주 맛있었지만. 다음엔 친구 어드밴티지로 더 맛난 커피를.

이쁜 가방도 만든 김에 이쁜 사진을 찍어볼까. 아! 저 벤틀리 앞에서 찍어줘. 최대한 자연스럽게 지나가 볼게.

우하핫 자연스러운 건 역시 안 되는 거구나. 근데 벤틀리는 왜 엉덩이만 나왔니. 그냥 가던 길이나 가자~

햇빛이 사방에 퍼져있어, 이상한 사진이 나와도 기분 좋은 일요일 오후.

옛날에 어느 남자 인터넷 쇼핑몰에서 '160cm의 영웅'이라는 카피에 빵 터진 적이 있었다. 그 쇼핑몰은 대박이 났다. 그것의 여자버전이 있다면 이 아이가 모델이 되면 좋을 것이다. 뭘 입어도 완벽한 간지를 자랑하는 160의 모델이다.

H가 마음에 드는 사진을 찍어주어서 모든 프사를 갈아치웠다. 셀카를 백개천개를 찍어도 이렇게 자연스러운 표정은 잘 나오지 않으니까.

길가 좌판에서 이쁜 팔찌를 발견했는데 주인 오빠가 너무 비싸게 불러서 포기했다. 그리고 근처 액세서리 가게에 들어갔는데 진짜 마음에 드는 팔찌를 발견했다. 길가 팔찌 가격의 열 배였다. 사람이고 물건이고 이쁜 건 이쁜 값을 한다.


마지막 '봄의 상하이'를 즐기기에 좋은 일요일이었다.

그리고 우중충 비 오는 월요일이 어김없이 왔고,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 저녁이 되었다.

이제 진짜 짐을 싸야 하는 저녁.


한 달을 넘게 다녀올 거라서 짐이 많다.

저가항공사를 탈 예정이라 허락된 수화물 용량은 적다.

이래저래 난관이 많지만 알차게 짐을 꾸렸다.


그러다 동생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강풍과 비바람으로 제주공항 마비. 대부분 항공편 결항.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난기류인데, 난기류 특보란다.


내일 아침, 1만 4천 명이 발 묶여 있는 공항으로 간다.

오전 8시부터 해제라던데, 우리 비행기는 7시.

우리의 운명은 제주도 하늘만이 알겠지.

연착은 감수하겠으니,

살려만 주시고.


앞으로 상하이->제주->서울->파리->서울->상하이의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다.

안전하게 완수해야 하는 미션임으로, 내일의 강풍특보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액땜이기를, 진심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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