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nghai #73_돌아온 이방인
상하이엔 비가 왔다. 매일 축축했다. 나도 돌아왔고, 나도 한동안 축축했다. 여기에 먼저 도착한 것이 장마인지 나인지 모르겠다. 장마는 모든 상하이를 누비며 만끽하고 있었지만, 나는 한 달 반 만에 돌아와 어느 곳도 누비지 못한 채 들떠 있었다. 신이 나서가 아니라, 제대로 발붙이지 못해 낯선 심정으로.
며칠을 축축한 채로 늘어져 있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러다 보면 다시 잘 들러붙겠지. 물먹은 종잇장처럼.
그런데 정신을 차린 계기는 의외로, 레인부츠였다.
공기반 다리반 퍽퍽 거리는 고무장화를 신고 보도블록을 걷는 기분. 아. 상하이 느낌이다.
사실 나는 레인부츠를 태어나 처음으로, 상하이에서 신었다. 각인이 된 줄도 몰랐는데. 그렇게 차박차박 길을 밟다 보니, 완쾌된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모든 감정이 되살아났다. 내가 이곳의 비를 좋아했다는 사실까지.
비 오는 일요일, '세계 10대 커피숍'이라 자랑하는 [the coffee academics]에서 히로코와 한국어 수업을 했다. 수업 내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가 모두 등판. 그러다 보면 세 나라가 티격태격하는 게 웃길 정도로 우리는 참 닮아있다.
# 그리고 맑음
비가 며칠 내리다가, 가끔씩 해가 쨍쨍한 날의 상하이 하늘은 '미처 몰랐던 아내 발목의 섹시함'을 발견하는 것처럼 신선하다. 이런 날들도 좋았다.
잠시 상하이를 잊었던 나에게
6월의 장마는 모든 것을 되살려주었다.
이 곳의 비와 함께, 간간히 보여주는 파란 하늘과 함께
많이 걷고, 보고, 읽고, 쓰는 날들이었다.
이제 내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겠다.
진짜 해야 할 일들도 마쳤다.
90년대 유물 같은 전자레인지와 세탁기를 바꿨고,
마침내 제습기를 마련했다.
곰팡이 핀 옷들을 다 세탁하고
곰팡이를 제거한 벽에 락스물를 (처) 바른 후,
복수하는 심정으로 제습기의 전원을 딱.(니들 다 죽었어)
5시간 만에 2리터 물통이 가득 찼다.
(그동안 물먹는 하마 백개는 썼을 텐데, 그런 걸로는 택도 없었던 거다)
방바닥이 뽀송뽀송한 기분을,
상하이에 이사 온 이래 처음 느꼈다.
밖으로는 상하이 장마의 낭만을,
안으로는 제습기 파워의 뽀송함을
아수라백작처럼 즐기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