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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Jul 06. 2016

상하이 장마의 두 얼굴

Shanghai #73_돌아온 이방인

상하이엔 비가 왔다. 매일 축축했다. 나도 돌아왔고, 나도 한동안 축축했다. 여기에 먼저 도착한 것이 장마인지 나인지 모르겠다. 장마는 모든 상하이를 누비며 만끽하고 있었지만, 나는 한 달 반 만에 돌아와 어느 곳도 누비지 못한 채 들떠 있었다. 신이 나서가 아니라, 제대로 발붙이지 못해 낯선 심정으로.


며칠을 축축한 채로 늘어져 있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그러다 보면 다시 잘 들러붙겠지. 물먹은 종잇장처럼.

그런데 정신을 차린 계기는 의외로, 레인부츠였다.

공기반 다리반 퍽퍽 거리는 고무장화를 신고 보도블록을 걷는 기분. 아. 상하이 느낌이다.  


사실 나는 레인부츠를 태어나 처음으로, 상하이에서 신었다. 각인이 된 줄도 몰랐는데. 그렇게 차박차박 길을 밟다 보니, 완쾌된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모든 감정이 되살아났다. 내가 이곳의 비를 좋아했다는 사실까지.


비 오는 주중 한낮에 가면 이 정원의 주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하루 종일 앉아있으면 더 그렇다. 내가 그랬다.
비 오는 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면, 이 카페의 이 자리가 좋다.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이 앞에 있으면 더 좋다. 그날 그때처럼.
이렇게 계속 마주 앉아 있으면 한 번쯤 나에게 말을 걸 것도 같은데, 영 심드렁한 '이 곳의 진짜 주인'
이런 카페가 내 이십 년 후의 꿈인데, 그때쯤엔 고양이 한 마리쯤 키울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저런 (앙칼지지 않고) 무던한 친구라면.
요즘 유난히 자주 가는 이 카페는 비 오는 날 훨씬 더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카페에 붙어있는 아이스크림 집에 늘어선 줄이 훨씬 줄어든다.
안에는 커피 향이 가득 차있고, 앞에선 비에 젖은 흙냄새가 밀려온다. 큰 창의 프레임 밖은 한 편의 롱테이크 영화. 그 날엔 이 카페에 두 번이나 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아무 생각 없이 위를 바라보면, 조그만 천창 밖으로 플라타너스가 반짝이고 있다. 밖은 분명 비가 오는데.
외국인들의 맥주 거리, 용캉루(永康路)에서 나는 늘 커피만 마신다. 언제나 이 카페. 비 오는 주말에도 사람은 많았다. 맥주를 마시고, 사랑을 하는.
맞은편 2층 집의 빨래는 종일 비가 와도 걷히질 않았다. 창문까지 활짝 열어놓고 주인은 어디로 간 걸까. 아주 낙천적이거나 아주 정신머리 없거나.
무심한 듯 세심한 H의 사진이 나는 늘 좋다. 우리 셋은 이 자리에 취해서 종일 앉아있었다. 나는 커피 두 잔을 연타로 마시고 손을 조금 떨었다.


비 오는 일요일, '세계 10대 커피숍'이라 자랑하는 [the coffee academics]에서 히로코와 한국어 수업을 했다. 수업 내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가 모두 등판. 그러다 보면 세 나라가 티격태격하는 게 웃길 정도로 우리는 참 닮아있다.



# 그리고 맑음


비가 며칠 내리다가, 가끔씩 해가 쨍쨍한 날의 상하이 하늘은 '미처 몰랐던 아내 발목의 섹시함'을 발견하는 것처럼 신선하다. 이런 날들도 좋았다.

놀라운 인연의 사람들을 만나러 갔던 날. 저 하늘 아래 내가 늘 갖고 싶던 정원이 있었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깃줄에다 음표를 더 붙여서 노래 하나 만들고 싶던 우캉루(武康路)의 하늘. 피리 부는 소년을 따라간 아이들처럼 무언가에 홀려 한참을 걸었다.
후난루(湖南路)의 좁은 길에 특별히 볼거리는 없다. 하지만 산책 가들 에게는 너무 사랑스러운 길이다. 특히나 비 개인 직후의 이런 날에는.
파란 하늘 아래 수줍게 고개 내민 우리 집이 귀여워서, 결국 아파트 한 바퀴를 더 돌았다. 사진을 찍어 한국의 Y에게 보냈다. 빨리 돌아오라고.


잠시 상하이를 잊었던 나에게

6월의 장마는 모든 것을 되살려주었다.

이 곳의 비와 함께, 간간히 보여주는 파란 하늘과 함께

많이 걷고, 보고, 읽고, 쓰는 날들이었다.

이제 내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겠다.


진짜 해야 할 일들도 마쳤다.

90년대 유물 같은 전자레인지와 세탁기를 바꿨고,

마침내 제습기를 마련했다.


곰팡이 핀 옷들을 다 세탁하고

곰팡이를 제거한 벽에 락스물를 (처) 바른 후,

복수하는 심정으로 제습기의 전원을 딱.(니들 다 죽었어)


5시간 만에 2리터 물통이 가득 찼다.

(그동안 물먹는 하마 백개는 썼을 텐데, 그런 걸로는 택도 없었던 거다)


방바닥이 뽀송뽀송한 기분을,

상하이에 이사 온 이래 처음 느꼈다.


밖으로는 상하이 장마의 낭만을,

안으로는 제습기 파워의 뽀송함을

아수라백작처럼 즐기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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