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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Jul 09. 2016

몸에 좋은 날

Shanghai #75

지난 한국 방문 때 폐기능 검사를 받았다. 정상인의 80%였다. 이 정도면 유지가 잘 되고 있다고 했다. 사실 원래도 폐활량이 좀 부족한 인생이었다 싶어서, 내 기준으로는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돌아온 상하이는 장마. 


비가 오는 날에도, 안 오는 날에도 언제나 눅눅했다. 매일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면 바람이 습기를 잔뜩 몰고 와서 이게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이 안됐다. 그때 누군가 '습할 때 향초를 키면 좋아요' 했던 말이 기억에 났다. 선물 받은 예쁜 향초들을 켰다. 침실, 욕실, 거실에 하나씩.


그런데 갑자기 비가 또 오네. 비가 들이치자 창문을 닫았다. 거실에서 혼자 작업을 하는데, 빗소리도 들리고 향초 향도 퍼지고 은근 낭만 있네 이거... 그런데 왜 졸리지.


꿈속의 나는 감기에 걸렸다. 기침감기에 걸려 팔십 노인처럼 기침을 하는데, 너무 현실 같아서 진짜로 가슴이 답답했다. 팔십의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켁켁거리다가 생각했다. 나는 아마 이렇게 기침을 하다가 생을 마감하겠구나.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꿈이 아니네.


목이 따가워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두 시간쯤 지나 있었다. 그동안 집안은 밀폐된 점집이 되었고, 나는 마른기침을 하며 접신을 하고 있었다. 그 신은 천식님이었다. 오랫동안 잘 관리되고 있다 믿었던 그 님.


벌떡 일어나 모든 초를 끄고, 비가 들이치는 창문을 열었다. 때는 이미 늦었다. 나의 기관지는 대학생 취업문처럼 좁아졌다. 아. 그렇게 잠들어버릴 수가. 아.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모든 일은 늘 자이로드롭과 같아서, 좋아지는 건 느려도 나빠지는 건 한 순간이다. 사건 이후로 요즘은, 잊고 지내던 더덕즙 팩을 꺼내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빨아먹고 있다. 이렇게 폐활량이 느는 건가.


뭐. 다시 조금씩 나아지겠지. 생각하기로 했다. 다스릴 것은 병이 아니라 내 무식함일 뿐. 간간히 (가위가 아니라) 목이 눌리는 꿈을 꾸지만, 뭐 꿈이니까. 헬스장 운동은 더 미뤘다. 산책이나 하자. 날씨는 어떤가. 창문을 열어봤더니. 오~ 

파란 하늘만큼이나 아름다웠던 건 공기 질(AQI)이었다. 어서 나가서 다 마셔버리겠어. 이 맑은 공기, 폐에 다 채울 거야. 물론 내 용량은 최대 80%.  

서둘러 집을 나서다가 우리 아파트 주민 고양이를 만났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저 아이가 사람을 보고 놀라거나, 도망가거나, 피해가는 걸 본 적 없다.


고양이 뒤태가 말한다.

뭐 이 정도 날씨 가지고.

가던 길이나 가셔.


신이 나의 부주의와 어리석음을 위로하며 

선물 같은 날은 주었다.

내 몸에 좋은 날.


심드렁한 고양이 주민과 

말없이 함께 걸어도 좋을 것 같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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