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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Jul 15. 2016

오늘의 입장

Shanghai #78_비 오는 주중엔 우캉루로.

오후 수업은 나에게 옳지 않다. 하루를 반토막 내 버린다. 어김없이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서, 세상 모두가 반나절의 하루를 산 즈음에야 '오늘'을 시작한다. 혼자 아침 운동을 할 수 도 있고, 일찍 일어나 어떤 작업들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시키지 않으면' 잘 내키지 않는다.


직장을 너무 오래 다닌 부작용이다. 노예근성이 뿌리 박혀서 뽑히질 않는다. 독립적인 인간으로 태어나 노예근성의  피를 수혈받고, 어느새 나는 '누가 시킨 일만 독립적으로 하는'탄력적 독립인간이 되었다.

어쨌든 하루는 오후에 시작됐다. 저녁에 회의 하나가 있어서 늦은 오후에 커피 마실 시간을 벌었다. 회의 장소는 우캉루(武康路). 비가 오는 우캉루에서 가야 할 커피집은 단연 GRAINS다. 해 좋은 날보다 비 오는 날이 3.2배 더 아름다우니까. 게다가 징글징글한 WIYF의 백 미터 아이스크림 줄이 이십 분의 일로 줄어든다.

동네 할아버지는 애완견과 산책을 나왔다가 산책로를 빼앗겼다. 그래도 비 오는 주중이라 사람들이 심히 적었으니 망정. 지난번 어느 주말에는 아이폰 파노라마 기능으로나 찍을 수 있을 만큼 긴 줄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우디 앨런의 영화 속 주인공처럼 마치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아이스크림이다.

아니 대체  콘 아이스크림이 뭐라고 백 미터가 넘는 줄을 서서 먹는단 말인가. 별로 맛있어 보이지도 않아. 사진을 찍는 포즈도 하나같이 똑같다. 팔을 뻗어 한 손에 그것을 들고 다른 손으로 찰칵. 이게 무슨 인증 미션 사진도 아니고, 포켓몬 GO 아이템도 아니고, 뭐 그리 죽자고 달려와 아이스크림 아이템을 먹고 찍고 할 일인가 말이다.

그래. 먹었다. 먹어봤다. 궁금했다. 다크 초콜릿에 솔티드 카라멜을 쌓았다. 다른 친구들은 바닐라를 골랐다. 다들 정신없이 먹었다. 누구나 그렇게 찍어대는, 그런 사진도 찍었다. 줄이 길지 않았고, 한번쯤은 먹어봐야 했고, 생각보다 비싸지 않았고, 솔티드 카라멜이라는 말이 좋았다.  


그래. 나는  '탄력적 독립형'인간이자, '내로남불'의 전형적 인간이며, '인지부조화'를 실천하는 인간이다. 그러곤 내일부터 사랑하는 햄버거집과 카페 앞에 백미터 긴 줄이 늘어서서, 이 여름날의 초록 풍경을 망치고야 마는 꼴을 비난 다시 할 것이다. 생각해보니 아이스크림이 너무 달았다.

상하이로 출장 온 J가 카페에 잠시 들렀다가 그 아이스트림 맛을 '너무 손쉽게' 봤다. J는 이게 '뭣이 그렇게 유명헌지'도 모르고 맛있게 먹었다.  

레이첼스의 비 오는 천창은 여전히 낭만적이다. 오랜만에 맛본 이 곳의 햄버거도 천창만큼 짜릿했고. J가 계산을 하는 순간엔 감동이 절정에 달했다.

V는 회사를 마치고 와서, 늦은 밤 회의까지 끝내고 나니 눈알이 벌게졌다. 하지만 '이제 진짜 파티를 시작해야 할 것 같은' 그녀의 섹시한 뒤태.  

밤의 우캉루는 너무도 고요해서 시간이 멈춘 기분이다. 이런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 이 길  끝에서, 꿈속 어딘가로 이어질 것 같은 길이다.


아무리 그래도 자전거는 위험해서 안돼.

늘 멀더에게 경고를 한다. 하지만 지금 또 상상한다.

이쁜 자전거를 타고 플라타너스가 우거진 이 길을

시원하게 달려보는.


오늘 Y가 '이 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바람을 맞으면 너무 좋아'라고 말했을 때, 하마터면 자전거를 사자고 할 뻔했다.


나의 심리상태는 당분간

탄력적 독립형에서 내로남불, 인지부조화를 거쳐,

내적 갈등을 통과하여 자아분열로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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