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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Aug 23. 2016

밀도 없는 하루도 빠르게 간다

Shanghai #79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르는 건 회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일에 쫓기고, 흐릿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어떤 두려움과 압박에 쫓겨 그렇다고 생각했다. 늘 달리는 기분이라 그런 거라 생각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아무것에도 쫓기지 않는 요즘의 하루는 그때보다 더 빨리 가는가. '옛날 초등학생'의 하루처럼 공기놀이, 고무줄놀이를 하고 가끔씩 일기나 받아쓰기를 할 뿐인데 왜 그때처럼 시간이 가만가만 흘러가지 않는 건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키보드를 얼마간 두드리다 정신을 차려보면 늘 저녁이 되어있다. 하루가 모두부처럼 단순한데, 깍두기 모양으로 썰어서 여러 번 떠먹을 정도로 잔일이 많지도 않은데, 두부 한모가 통째로 없어져있는 거다. 어느 순간.     

아래보다 위가 훨씬 더 이쁜 길. 좋아하는 길은 아닌데 좋아하는 카페가 있는 길. 

집사는 청소를 하고 주인은 낮잠에 빠졌다. 고양이는 왜 늘 햇볕에서 잘까. 근데 왼쪽 앞발을 펴 줘야 하나.

갓 문을 연 카페는 갓 세탁한 블라우스처럼 산뜻하다. 저 긴 테이블을 그대로 우리 집 거실에 갖다 놓았으면 좋겠다. 

주인님이 집안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경계도 없는, 전형적인 상하이 고양이. 근데 앞발은 괜찮니.

짝꿍이 돌아가고 남은 자리는 담담하다. 커피 한잔과 물 몇 잔을 마시다 보니 여섯 시간이 지나 있었다. 역시 나는 책상머리가 체질인가 보다.  


카페에서 집까지는 지하철 두정거장, 택시로 10분, 걸어서 50분.

하루 종일 앉아만 있어서 좀 걸어가기로 했다.

요즘 멀더와 -쓸데없이-하는 만보 경쟁도 생각해서.

걷다 보니 집에 도착했다.

결국 만보를 걸었고

오늘도 내가 이겼다.


하지만 나는 더위를 옴팡 먹고

아홉 시부터 소파에 몸져누웠다.

참깨라면에 밥을 말아먹었어도

한여름의 진리인 '뽕따'를 영접했어도

호랑이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은 37도.

멀더와 나는 둘 다 패배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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