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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Mar 19. 2016

요리 신입사원의 나날들

Shanghai #35

돌아보면 8개월이나 됐는데, 당최 늘지 않는 게 요리다. 8개월동안 요리에 들인 시간을 고스란히 중국어에 들였거나, 아니면 (늘 하던 대로) 광고 아이데이션이나 카피 쓰는데 들였더라면 나는 조금 더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중국어를 지금보다 덜 못했겠지. 그래도 다행인건 레시피를 따라할 수 있는 음식이 몇 개 늘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최근 일취월장한 짝꿍 Y의 요리실력에 고취되어 나도 몇 가지 새로운 '요리실험'을 감행했다. 


발사믹 오리엔탈 드레싱을 곁들인 감자 샐러드와 프렌치 토스트. 샐러드는 얼추 했는데 토스트는 탔다. 어떻게 해도 탔다. 어떻게하면 타지 않는지.에 대한 레서피는 인터넷에 없었다. 그냥파리바게트에서 산 식빵이니까 프렌치 토스트인걸로 했다. 


알고 보니 문제는 설탕이었다. 며칠 전 남편이 해준 프렌치 토스트가맛있어서 비결을 물었더니 설탕을 뿌린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했다. 계란 옷 입은 식빵을 뜨거운 팬에 올리자마자 설탕 투하. 그런데 갑자기 검은 연기가 솟아 오르는 게 아닌가. 계란은 익지 않고 설탕이 성을 내며 새까맣게 타버리는 거다. 남편은 말했다. 설탕은 그때 뿌리는 게 아니네 이사람아.


며칠 뒤엔 팬케이크도 흉내 내 보았다. 너무 달았다. 심지어 팬 케이크는 외국 마트에서 사왔고, 나는 바나나와‘악마의 초코’ N도 발랐는데 맛이 없을 수 있었다. 


웨스턴 요리는 글렀고, 깍두기에 도전했다. 초간단 레서피라는 포스팅 제목이 맘에 들었다. 양파즙도 새우젓도 생강도 없었지만 일단 완성했다. 생애 최초의 깍두기 치고는 괜찮다고, 심지어 맛도 괜찮다고 남편이 말해줬다. 초등 2학년 정도로 진급한 기분이었다. 내친김에 주말에는 두부조림 2차 실험을 시도했다. 역시 인간은 진화의 동물이다.이제서야 두부에 간이 뱄다. 샐러드도 2차 제조에 들어가니 시간이 단축됐다. 깍두기는 적당히 시었다. 아랫층 E가 계란말이를 해와서 훌륭한 상이 차려졌다. 그렇게 또, 한끼를 떼웠다배웠다.


십 수년 전 신입사원 때, 팀에 사수도 없이 혼자 있던 시절이 있었다. 카피라고는 한줄도 써본 적 없던 나에게, 광고주는 만부 이상을 찍는 카탈로그 안에 들어갈 기업PR 카피를 한 뭉텅이 써오라고 했다. 내게 위대한 열정이 있었다기보단, 내 손으로 회사먹칠을 할게 두려워서 며칠밤을 샜다. 스프링노트 한권을 다 썼다(깜지도 아닌데;;) 속으로 덜덜 떨면서 카피 최종 컨펌을 받고, 그 카피가 종이에 인쇄되어 나오던 날, 나는 그걸 가보로 남겨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요즘 그 날들을 복기하고 있는 기분이다. 

우리 집에서, 사수없이 홀로 요리를 배워가며 

그때의 깜지처럼 프렌치 토스트나 까맣게 태워가면서. 

사실, 그 카탈로그는 가보가 되지 못했다. 그 카탈로그에는 우리팀 팀장도, 임원들도, (심지어 매우 까다롭던) 삼성전자 갑님들까지도 눈치채지 못한 결정적 오타가 있었다. 나는 재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닐 암스트롱'을 써야 할 곳에 '루이 암스트롱'이라고 버젓이 써놓았다. 만부 인쇄 이후 발견했다. 그것도 형부가.


나는 회사에서 눈에 보이는 카탈로그는 죄다 치워버렸고,

그 사건은 완전범죄로 끝이 났다. 

더불어 가보도 사라졌다. 

검게 탄 프렌치토스트를 남편이 오기 전에 다 먹어치워버린 것처럼 말이다.



2015.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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