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nghai #82
무엇인가를 작정하고 나서는 날.
마음이 비장했다.
'잘 들어주기'로 작정한 날이다.
매우 중요한 일이다.
잘 들어주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돼지 여물통 같은 직장을 십수 년 다닐 수 있다.
내가 그랬다.
십수 년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준
내 첫 번째 사수는
여태까지도 내 어려운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분과 내가 그토록 다른 종류의 사람인데도
그녀의 '잘 들어줌'과 뼈 있는 조언은
늘 유효했다.
그런 사람이 나도 되고 싶다.
작정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온 건데, 막상 그녀를 기다리며 깨달았다. 그냥 그 친구가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날, 좋아하는 식당인데. 짧은 점심시간에 맞춰 헐레벌떡 뛰어온 그녀의 얼굴이 짠했다. 과거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가늘고 긴 팔의 그녀는, 그새 팔이 더 가늘어졌다. 요즘 같은 세상에 끼니를 못 챙겨서 마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심신을 달래줄 메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본 이래 그녀는 가장 적극적으로 음식을 먹었다.
앞에 앉은 내가 엄마가 아니라, 선배 언니라서 다행이었다.
엄마였다면 면역이 무너져 몸에 두드러기를 달고 온 딸을, 제대로 바라볼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녀는 내가 언젠가 겪었던 시절과 비슷한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해낼 수 있다. 잘 해낼 수 있다. 더 많이 할 수 있다. 계속할 수 있다.
뭐든 '할 수 있다'고 세뇌하며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스스로를 바닥내버렸던 날들.
모든 것은 경험이 되었노라고 위로했지만
그때 나는 완전히 소진되어
먼지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장 모든 것을 놓아버릴 수 없는 그녀에게
사실은 아무 조언도 해줄 수 없었다.
나조차도 완전히 소진되어버리기 전까지
아무것도 놓지 못했으니까.
다만 그녀의 팔이 더 가늘어지지 않기를.
혼자 있는 밤에, 홀로 듣는 노래에도
위로받을 수 있기를.
가끔 '잘 들어주는 것'을 핑계로
내게 얼굴을 조금 더 보여줄 수 있기를.
돼지 여물통 같은 회사 이야기도
지저분한 추억도, 다 추억이더라고.
그런 이야기 나눌 사람 하나 있다는 것도
너무 소중한 것이더라고.
만나고 돌아서 보니
오히려 내가 충전된 기분이더라고.
그녀가 짧은 점심을 보내고 간 후, 근처 좋아하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해야 할 작업들이 있었다.
이제 내게 시간마다 전화해서 일을 던지는 팀장도 없고
성과와 승률을 신경 쓰며 피를 말려할 일도 없고
촉각을 다투는 경쟁피티도 없지만
하루하루 묵묵히 해내야 할 일들이 있다.
할 건 많아도
소진되는 게 아니라
쌓여간다는 기분이 드는 일들.
그녀에게도 그런 일들이 올 것을 안다.
꼰대 같은 말이지만
세월이 흘러보니 그랬다.
그런 일들이 오기까지
도움닫기를 하는 시절도 필요하다는 걸.
그녀의 척박한 오늘이 분명
좋은 도움닫기가 될 것이라는 것도.
그렇다고 높이 뛰기도 전에
도움닫기에 너무 힘 빼지는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