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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Sep 07. 2016

매거진 [Hi,Shanghi] 하이상하이에 글을 실었다

#issue 002. 8월호

  MEET THE CITY - Essay  


"네 멋대로 널어라"

- 상하이의 ‘외향적인 빨래’가 말해주는 이야기들



어릴 적엔 옥상이 늘 부끄러웠다. 정확히는 옥상 위 빨래가. 딸이 넷인 우리 집의 빨래는 늘 많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옥상에 여자 팬티 다섯 장이 줄줄이 걸렸다. 우리 집과 똑같이 생긴 건너편 2층 집엔 남자 형제 넷이 살았다. 두 집 자식들은 겉옷부터 속옷, 양말까지 서로의 패션 취향을 모두 파악하며 사춘기를 보냈다. 그리고 그 여덟 자식들이 다 커서 고향을 떠날 무렵, 동네의 옥상 빨랫줄은 거의 다 사라졌다. 세상의 빨래들은 실내 베란다로, 거실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이웃집 사람들의 속옷 취향 같은 건 알 수도, 알아서도 안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상하이의 우리 집은 ‘빨래하는 맛’이 있는 집이다. 방안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창이 28층의 햇살을 고스란히 받아낸다. 하지만 빨래를 널 때는 세심하게 신경을 쓴다. 그 시절 고향집처럼 맞은편에 우리 집과 똑 같이 생긴 아파트가 버티고 있다. 속옷은 건조대 아래쪽에 수건은 위쪽에, 엄마의 취향을 물려받아 수건 끝의 각을 딱딱 맞춰 이쁘게 정렬한다. 그렇다. 상하이로 이사와 처음 며칠은 우리 집 창가가 이 구역에서 제일 낭만적인 줄 알았다. 며칠 후, 그 풍경을 마주치기 전 까지는.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가장 예쁜 빨래는 어딨니’ “네 주인님 창가입니다.”일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요”하며 펼쳐 보인 광경이었다. 옆 동네 주민들의 총 천연색 빨래는 가을 해의 스포트라이트를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그날부터 나는 상하이 ‘창 밖 빨래’의 매력에 사로잡혔다. 길을 걷다가도, 택시에 앉아 창 너머를 보다가도, 노천카페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도, 밖에 널린 빨래만 보면 그들의 이야기가 상상 속에서 펼쳐졌다. 

빨랫줄이 이 동네의 ‘소셜 네트워크’ 일지도 모르겠다. 새 옷을 사면 여기 걸어 자랑할 수도, 누군가 지나가다 ‘좋아요’ 의 미소를 날려줄 수도 있다
자유와 열정이 느껴지는 가족이다. 각 맞춰 너는 건 왠지 ‘힙’하지 않다며 대충대충느낌 있게.
하늘은 우릴 향해 열려있어. 그리고 내 곁에는 해가 있어
알고 보면 가족이야 말로 ‘적정거리 유지’가필수다. 이 빨래들처럼 통풍이 잘 될 때 빨래도, 서로의 관계도 산뜻해진다.
아버지를 닮아 힘세고 순둥한 아들이 이 골목에서 나고 자라, 3대째 내려오는 국수집을 물려받을 것만 같은 부자지간.
남자는 묵묵하지만 다정하고, 여자는 화려하고 도도하다.  전형적인 상하이 부부의 신혼 빨래가 아닐까.
말하자면 양쪽 두 집의 [공동 건조 구역]. 빨래협정을 맺은 이웃과는 패션 스타일도 공유하는 걸까.
이것은 흡사 명동 한복판에 자신의 속옷을 널어놓은 것과 같다.  상하이 최고 관광지 티엔즈팡 한가운데서도 상하이 빨래들은 여지없이 일광욕을 한다.
어느 죄 없는 빨래는 나처럼 건망증이 심한 주인을 만나 저녁이슬을 맞고 있다.  하지만 어때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는걸.

이쯤 되고 나니, 네네 이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당신 속옷의 취향 같은 거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떻습니까.


옆집 아주머니의 팬티 사이즈를 안다는 것

내 고향에서처럼 우리도 어느 시절에는 빨래를 밖에 걸었다. 하지만 모두가 조금 더 잘 살게 되고, 세상이 조금 더 각박해지면서 우리는 옥상을 걷어내고, 아파트를 세워 빨래를 안으로 들이기 시작했다. 빨래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당연히 내향적, 보수적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상하이는 모든 것의 흐름이 ‘아직’인 걸까. 아니면 우리와는 그저 ‘다른’ 것일까. 어떻게 이들의 빨래는 이토록 외향적이고 개방적인 걸까. 나는 그것이 알고 싶었다. 김상중씨보다도 더.  


어느 날, 중국어 수업시간에 ‘각 국의 문화 차이’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상하이에 와서 크게 다르다고 느낀 문화는 무엇이 있었나요. 내 차례가 되자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옆집 아줌마의 팬티 사이즈를 알아요.” 순간 교실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아니, 매일 밖에 걸려있던걸요”옆에 있던 일본인 친구도 맞장구를 쳤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속옷을 다 보는데도 정말 괜찮은 거예요?”라는 내 물음은 궁금함을 넘어 걱정에 가까웠다. 내가 빨래들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친 건 차치하고. 


“아, 우린 남의 빨래에 관심이 없어요.” 중국인 선생님의 대답은 단순했다. “네?” 내가 예상했던 답들이 머쓱하게 사라졌다. 가령 “어쩔 수 없죠, 좀 보면 어때요, 이제 와서 바꾸기 힘들어요. 혹은 우리는 햇볕에 바짝 말리는 걸 좋아해요.”등의 보기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래저래 하거든요.라고 우리의 방식을 설명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옆집 여자가 어떤 티셔츠를 입는지, 어떤 브랜드의 운동화를 신는지, 어떤 이불을 덮고 자는지, 양말이 촌스럽진 않은지, 속옷까지 그럴싸한지를 보게 되는 순간 우리는 그녀를 가늠한다. 그리고 신경을 쓴다. 반대로 내 빨래가 나의 무엇을 폭로하고 있는지 곤두세운다. 더구나 각박한 세상에서 내 면면들을 보여주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며. 우리의 빨래는 그렇게 점점 내향적으로 변했다. 


“관심이 없다.”는 단순한 말의 파장은 컸다. 그것은 무관심과 다르다.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옷 사이즈가 큰 옆집 아줌마의 비만에, 국숫집 사장의 낡은 티셔츠 얼룩에, 벼락부자의 황금색 취향에, 내 기준을 투영하여 논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이들이 길가에 자신의 면면을 널어놓아도 그것은 ‘타인의 취향’ 일뿐. 길 가던 이는 그저 가던 길을 가면 그만이다. 이제야 알겠다. 왜 길가 만두가게 아저씨들이 배를 드러내고 앉아있는지. 상하이 젊은 친구들의 패션이 어찌 그리 과감한지. 무엇하나 획일적이지 않고 제멋대로 인지. 그리고 이 도시의 빨래들이 왜 이토록 외향적인지.


한 도시의 문화를 하나의 기준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겠으나, 생경했던 이 도시의 많은 풍경들이 이해되었다. 그러고 나니 ‘빨래가 신기하다고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의 눈에 비쳤을 내 모습을 생각한다. 내 모습을 닮은 우리의 모습까지도. 오랜 시간 참 피곤하게 살았다. 하지만 상하이에 와서 나는 ‘더 이상 주변인들을 이해시키며 살지 않아도 되는 일상’을 맞이했다. 이제 나도 이들처럼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펼쳐볼 테다. 소박한 내 꿈도, 아무 쓸모없지만 재미있는 취미 생활도, 트렌드에 합류하지 못하는 소소한 취향들까지도. 내 멋대로 널어놓아도 좋은 도시, 여기는 상하이니까. 



기다리던 2호가 출간되었다. 마음이 맞는 잡지에 하고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감사했다.

보여주고 싶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직도 너무 많은 곳. 

여름이 떠나지 못한 9월의 상하이는 여전히 HOT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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