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필소녀 Oct 18. 2016

돌아온 10월의 일들

Shanghai #83

                                                                                                                                  

한 달이 걸렸다. 모든 게 제 자리를 찾는 게.

한국에 다녀오는 일은 쉽지 않다.

내 나라에 가는 것처럼 반갑고 편한 일이 없겠지만

갔다 오고 나면

그만큼 이곳의 일상은 무너진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고

동생의 고된 출산을 목격하고

조카 3호의 탄생을 함께하고

그리웠던 친구들을 '잠깐'보고

잔챙이 병들을 진단받느라 7개의 병원 투어를 마치고

한국인으로서의 공사다망한 잡무를 처리하고

상하이에서는 쓸데없이 고가인 한국화장품을 사고

한국에서만 파는 신상품 라면을 한가득 싣고

상하이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오면 늘 그렇듯이

산책, 운동, 공부도, 누굴 만나도 싶다는 생각도 없어진다.

한국 TV에 다시 빠져, 한국인들도 다 보지 않는 예능프로를 꿰고 앉아

못 먹어보고 돌아온 김밥, 닭도리탕, 부대찌개, 매운 낙지볶음 같은걸 상상한다.


이곳에 '친구들과 함께하는 일'이 있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더 오랜 시간을 멍청하게 보내고서야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여름에 떠난 상하이는 서울의 가을을 이미 겪고 왔는데도 여전히 여름이었다. 파란 하늘의 침실 창밖 풍경은 서울에서도 때때로 그리웠다
멀더는 요즘 '인생 최대 몸무게'를 찍고 있다. 문제는 멀더와 나의 몸무게가 쓸데없이 같은 비례로 증가한다는데 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이제서야 읽고 있었는데, 우연히 베로니카도 그 책을 읽고 있었다. 소설가 취향도 같은줄 몰랐다. 이런 친구를 내려주시다니.
요즘 우리가 거의 매일 가는 카페, 아니 회의실이다. 갓구운 빵과 커피와 콘센트와 호텔 화장실이 있는 곳. 무엇보다 베로니카 회사 옆.

회의는 늘 정신없고 촉박하다. 회사에 다닐 땐 회의 시간이 너무 길었는데. 회의 때 늘 있는 유체이탈자와 영혼이탈자가 없어서 그런가.

우리 아파트 고양이는 여전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길에서 무엇이 지나가든 비키지 않는 분. 이 구역의 주인은 본인이라는 눈빛.

손수 음식을 만들어 친구들을 초대하고 혼자 치우는 것도 기꺼이 해내는 마음은 무엇일까. 나와는 너무 다른 종족의 친구가 존재하므로 행복했던 밤. 

개공포증을 완벽하게 극복하지 못해, 몇시간 동안 의자에서 하반신을 내려놓지 못했네. 하지만 하반신의 무감각 따위 잊게했던 그날의 만남.

가을에 더 빛나는 상하이 카페들. 플라타너스 길에 놓여있어 더 아름다운 곳. 커피 한잔으로 인생이 조금은 더 살만하게 느껴지는 곳.

정원 테이블 하나가 카페 고양이 낮잠자는 침대가 되어 있었다. 그 날의 햇볕까지도 다 그의 차지였다
꽃과 볕과 바람과 친구들과 일과 수다가 범벅되어도 좋은 날. 사진을 아무리 찍어대도 질리지 않는 날.
노트북과 그에 딸린 식구들, 카메라와 꽃까지 지고서 길을 쏘다녔다. 기분은 좋았는데 집에 들어가니 그 짐들을 내려놓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름도 모르는 예쁜 꽃은 결국 우리집 거실로 모셨고. 꽃담당 그녀 덕분에 오늘 하루도, 거실의 풍경도 한껏 가을가을 해졌다
오랜만에 만난 w에게 무얼 먹고싶냐 했더니 '양식'이라고 말했다. 돈까스를 썰야할 것 같은 심정으로 좋아하는 레스토랑에 모셨다.
'자라같은' 성격의 남자로 다시 태어난다면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맛있는 '양식'을 영접한 그녀는 가을 햇살처럼 웃었다
Trim&Twist 라고 써있는 귀여운 바버샵 이발소. 갑자기 창문에 늘어놓은 대걸레가 손님 머리처럼 보인건 기분 탓인가.
멀더가 너무 맛있다고 추천하여 굳이 찾아간 '락사'집. 그는 와이프가 코코넛 밀크를 입에도 못댄다는 사실을 십년째 까먹고 있었다. 망할. 굶주린 저녁.
간만에 찾은 신티엔디(신천지)는 여전히 화보 찍는 촬영장이었고, 그새 새로운 가게들이 여럿 생겼다. 새 카페 탐방으로 오늘을 시작.

새로 생긴 [glass house] 카페에선 거꾸로 매달아 놓은 화분이 시선을 잡는다. 새 카페 앉아 새 멤버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설렘.


때로 다시 일상을 일으켜야 할 때, 이런 곳의 활기가 도움이 되곤 한다. 지난 한주는 너무 달렸고, 너무 피곤했다. 이제 조금 단정하고 느슨한 루틴으로.
친구의 (한국인)친구가 하는 카페라고 해서 와보고 싶었다. 홍대가 아니라 상하이에 있는 [홍대 베어].


아메리카노를 우아하게 마시며 작업을 하고 싶었으나

결국 '아보카도 비빔밥'이라는 신선한 메뉴 앞에서 무너졌다.

배워와서 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보카도 못 까서 결국 못해먹겠지만)

신선한 비빔밥만큼이나 카페 주인의 인상이 좋았다.


상하이에 돌아와서 바쁘다는 핑계로 '택시녀 김부장'으로 잠시 컴백했다가

오늘부터 좀 걸었다.

긴팔 티셔츠 하나로도 산뜻한 날씨,

아직 걱정할 것 없는 공기,

브라운과 그린색 나뭇잎이 믹스된 길,

내 스케줄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이곳은 산책하기 좋은 도시고

가을을 즐기기 좋은 동네다.


무엇보다도 가을이 긴- 곳이라는 게

이 도시의 가장 큰 미덕.


이제 정말 '나가서' 

걷고 읽고 뛰고 쓰고 말하는 일상을

되찾을 때다.

매거진의 이전글 매거진 [Hi,Shanghi] 하이상하이에 글을 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