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nghai #83
한 달이 걸렸다. 모든 게 제 자리를 찾는 게.
한국에 다녀오는 일은 쉽지 않다.
내 나라에 가는 것처럼 반갑고 편한 일이 없겠지만
갔다 오고 나면
그만큼 이곳의 일상은 무너진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고
동생의 고된 출산을 목격하고
조카 3호의 탄생을 함께하고
그리웠던 친구들을 '잠깐'보고
잔챙이 병들을 진단받느라 7개의 병원 투어를 마치고
한국인으로서의 공사다망한 잡무를 처리하고
상하이에서는 쓸데없이 고가인 한국화장품을 사고
한국에서만 파는 신상품 라면을 한가득 싣고
상하이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오면 늘 그렇듯이
산책, 운동, 공부도, 누굴 만나도 싶다는 생각도 없어진다.
한국 TV에 다시 빠져, 한국인들도 다 보지 않는 예능프로를 꿰고 앉아
못 먹어보고 돌아온 김밥, 닭도리탕, 부대찌개, 매운 낙지볶음 같은걸 상상한다.
이곳에 '친구들과 함께하는 일'이 있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더 오랜 시간을 멍청하게 보내고서야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회의는 늘 정신없고 촉박하다. 회사에 다닐 땐 회의 시간이 너무 길었는데. 회의 때 늘 있는 유체이탈자와 영혼이탈자가 없어서 그런가.
손수 음식을 만들어 친구들을 초대하고 혼자 치우는 것도 기꺼이 해내는 마음은 무엇일까. 나와는 너무 다른 종족의 친구가 존재하므로 행복했던 밤.
가을에 더 빛나는 상하이 카페들. 플라타너스 길에 놓여있어 더 아름다운 곳. 커피 한잔으로 인생이 조금은 더 살만하게 느껴지는 곳.
새로 생긴 [glass house] 카페에선 거꾸로 매달아 놓은 화분이 시선을 잡는다. 새 카페 앉아 새 멤버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설렘.
아메리카노를 우아하게 마시며 작업을 하고 싶었으나
결국 '아보카도 비빔밥'이라는 신선한 메뉴 앞에서 무너졌다.
배워와서 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보카도 못 까서 결국 못해먹겠지만)
신선한 비빔밥만큼이나 카페 주인의 인상이 좋았다.
상하이에 돌아와서 바쁘다는 핑계로 '택시녀 김부장'으로 잠시 컴백했다가
오늘부터 좀 걸었다.
긴팔 티셔츠 하나로도 산뜻한 날씨,
아직 걱정할 것 없는 공기,
브라운과 그린색 나뭇잎이 믹스된 길,
내 스케줄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이곳은 산책하기 좋은 도시고
가을을 즐기기 좋은 동네다.
무엇보다도 가을이 긴- 곳이라는 게
이 도시의 가장 큰 미덕.
이제 정말 '나가서'
걷고 읽고 뛰고 쓰고 말하는 일상을
되찾을 때다.